전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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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이문열 지음
무섭다.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어느 학급(2-13)에서 벌어지는 학내 폭력문제를 다루고 있다. 최기표. 이유대. 임형우. 그리고 그들의 학급 담임 선생님과의 관계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무섭다.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이 글로 작품은 끝이 난다. '기표'의 마지막 편지는 내가 풀어야 할 문제의 핵심 단서임에는 틀림없다. 그 단서는 한 줄도 채 안 되는 몇 마디의 글만을 제시해 준다. 이 짧은 몇 마디의 글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뜻이었을까? 기표는 무엇이 그토록 두려웠던 것일까? 그의 학급, 넓게는 학교 전체, 심지어 선생님들까지도 그를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가! 기표가 우리들에게 던져 주려고 하는 메시지는 아마도 그가 말한 것처럼 실로 무서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단순한 학교 폭력 문제만으로 취급하고 싶지 않다. 기표의 마지막 편지 내용은 그의 폭력 이면에 깔린 엄청난 그 무언가가 분명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기표를 이 시대의 마지막 남은 양심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그 권력에 편승하여 안주하려는 대부분의 우리들에게는 그는 하나의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 이 글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이유대의 말은, '남을 다스리는 그런 자유보다 남에게 다스림 받는 데서 얻는 마음의 안일이 내게는 더 좋았다', 실로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중학교 3년 내내 권력의 선봉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그는 그런 생활에 염증을 느끼게 되고, 그것은 결국 그를 권력의 편에도 그 반대의 세력에도 속하지 않는 현실주의적이고 방관자적인 모습으로, 심지어는 기회주의자로 만들고야 만다.
권력의 집요함을 보여주는 인물은 기표가 아닌 임형우가 아닐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의 엄석대와 기표는 다르다. 엄석대의 치밀한 계획과 완급 조절은 기표에게는 없다. 오히려 그러한 집요함은 형우에게 나타난다. 유대가 기표에게 당한 후 형우가 유대에게 한 말은, "유대야, 너 그대로 참을 거냐?", 앞으로의 일에 대한 어떤 경고의 메시지인 듯하다. 임형우는 그의 배후세력으로 담임선생님을 선택하게 된다. "이 배의 선장이 누구냐, 그렇게 묻고 있는 사람의 번호와 이름은?"이라고 말한 담임선생님의 말속에는 반대 세력에 대한 처단의 메시지가 느껴진다.
이 학급의 실질적인 실권자는 기표가 아닌 형우라고 생각된다. 유대 집안의 어떤 형은 '신은 결코 악마를 영원히 추방하지 않아, 항상 곁에 두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일에 그것을 이용할 뿐이야'라고 말한다. 이 논리를 가장 잘 이용하고 있는 인물은 바로 형우다. 형우는 기표가 스스로 학교를 떠날 것을 예측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왔는지도 모른다.
기표는 형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신뢰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자신을 이용해 권력을 장악하려는 술책임을 알아차리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커닝 페어퍼 사건은 형우의 극본에 의한 조작이었던 것이다. 선생님과의 결탁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낙제의 위기에 놓인 동료 친구를 구제해 주겠다는, 우정을 가장한 명분은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분명 반평균의 상승으로 얻어지는 혜택을 떠올렸을 것이다. 권력의 반대편에 서있는 기표로서는 그들의 은밀한 거래로 성사된 그 조건부 페이퍼 (페이퍼를 받는 대가로 권력에 승복하라)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증거자료가 될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거래가 끝난 페이퍼 작전은 '우정'이라는 말로 무마된다.
힘없는 존재의 슬픔을 절실하게 느낀 기표는 다시 폭력으로 맞서게 된다. 하지만 그 또한 형우의 계산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형우의 입지를 곤고히 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이 작품에서 기표의 폭력은 아이러니한 요소를 담고 있다. 모든 폭력은 기표가 저지르고 있는 것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실상은 폭력 보다도 무서운 음모와 맞서는 작은 반항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기표의 팔뚝에서 솟아오르는 피를 꽃망울에 비유하고 있다. 아직 망울을 터뜨리지는 못했지만, 솟아오르려는 기표의 강한 의지가 담겨있는 듯하다. 솟아오르려 들지도, 그 망울마저도 감추어 버리는 우리들 속에서의 기표는 이 시대의 진정한 마지막 양심이 아닐까? 반면에 기표에게 당한 형우의 붕대 위의 피를 '꽃송이처럼 선명한 핏자국'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꽃망울과 달리 꽃을 피웠으며, 선명하기까지 하다는 표현은 권력의 힘은 형우에게로 옮겨 왔고, 걸림돌로 여겨지는 기표를 몰아냄으로써 선명해진다는 의미가 아닐는지...
방관적 자세를 취하는 유대조차도 권력의 배후에 깔린 집요함 (선생님과 형우간의 거래)을 본 순간 두려움을 느낀다. 병원에서 돌아온 형우는 기표를 돕자는 의도로, 구원이라는 허울 좋은 말로, 그의 궁핍한 가정생활을 낱낱이 드러냄으로써, 그가 버텨 나갈 마지막 힘마저 모조리 빼앗아 간다. 결국, 기표는 꽃망울을 터뜨려 보지도 못한 채 시들어 버리고 만다. 자신의 속을 다 들어내 보인 상황에서 기표는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고, 그네들(권력층)의 도움이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나약한 존재로 만들어져 버렸다.
더 이상 기표는 집요하기까지 한 세력의 힘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눈에 거슬리게 삐죽 모나게 자라난 가지는 잘리고야 만 것이다. 그의 마지막 저항은 '무섭다.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라는 편지한 통을 남긴 채, 더 이상 이용 당하지 않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작가가 이 작품을 쓸 당시의 사회상을 분명 이 작품 속에 반영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깊은 의도까지는 모르더라도, 기표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 속에서, 그 인물이 누가 되든지 간에 권력 속에 안주하려는 우리 자신의 일면을 보았을 것이고, 기표의 치부가 들추어진 듯이 나의 속을 들켜버린 것 같아 나 또한 부끄러움과 무서움을 느낀다.
이 작품의 제목은 <우상의 눈물>이다. 아마도 '기표의 눈물', 결국에는 '우리들의 양심의 눈물'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