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운 Dec 14. 2023

상담 및 심리치료이론 수업후기

Reflection paper 

상담 및 심리치료 이론 개론수업의 마지막 과제물인 Reflection paper입니다. 인상적인 이론을 중심으로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기술하는 과제물입니다. 저에겐 한 학기 수업을 들으며 학습하고 느꼈던 감정들에 대한 소중한 기록이 될 듯합니다. <주의사항 : 내용이 좀 길어요 ㅠ>



배경

학부 때 영어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언어학에 빠져 있었습니다. 촘스키 1)를 통해 알게 된 '선험적 언어 시스템'에 관심이 많았고, Universal language를 직관적으로 찾아내고 싶어 밤마다 누워서 어떻게 하면 직관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을지 마치 명상을 하듯 생각을 비워 내려고 애썼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보니 이 말하는 무의식 깊은 곳, 그가 말하는 '집단 무의식속에서 '언어시스템'이라는 '원형'을 찾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확충법 (amplification)을 알았다면 '원형'을 찾는데 도움이 되었을까요? 아마도 방대한 배경지식의 필요성에 지레 포기했을 듯싶습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무의식 세계로 진입하는 통로로 꿈을 이용했지만, 저는 맨 정신으로 도전했죠. 정신 나간 행동이었죠. 그땐 프로이트가 말하는 '꿈의 해석' 같은 건 알지도 못했으니까요. 알았다고 해도 결과는 똑같았을 것 같긴 해요. 지금 생각해 보니 마음 챙김 명상법으로 접근하는 것도 방법이겠다 싶네요. ㅤ


이런 고민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 'PUN'이란 언어학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PUN'은 말장난말 재롱이란 뜻입니다. 영문학과 교수님들께서도 지지해 주셨던 동아리였죠. 언어학 동아리지만 경험적 언어세계 이전의 '선험적 언어 시스템'에 오히려 관심이 있었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 밖'의 생각에 대해서 궁금했어요. 언어의 힘을 빌리지 않고 생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이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제법 많은 생각들을 우리가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영역을 자극하고 강화할 수 있다면 제법 창의적인 사람이 되겠구나 싶었죠. 그래서 언어 밖 세상의 탐험의 도구로 ''를 써 보기도 했어요. 시는 언어를 사용하지만 통용되는 언어의 상징에서 벗어나 있으니 좋은 도구가 될 것 같았죠. 


시인들은 세상을 지각된 세상과는 다르게 나름의 주관적인 '좋은 세상 quality world'으로 바라보는 탁월한 능력이 있잖아요. (현실치료에서 윌리엄 글래서가 말하는 충족된 욕구의 경험세계인 Quality world와는 다르지만 대상을 주관적으로 인식하고 재해석한다는 점에 서 빗대어 설명합니다.) Meta인지능력이 탁월한 사람들임에 분명해요. 사실 주관적 해석 없이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니 우리는 분명 언어 밖에서 대상의 의미를 다시 재해석해서 바라보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칸트가 이성의 범위 내에서 ' 오성의 범주'를 구분해서 말하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이것이 메타인지(metacognition)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실존적 심리치료에 빠져들고 있어요. 아직 실존적 심리치료의 방법적인 깊이는 모르지만, "앗~ 이거구나"라는 생각에 몸속의 세포들이 하나하나 살아나는 느낌이에요. 


사진촬영을 일로서 하고 사진교육에서 틀 밖의 시선으로 바라볼 것 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실존적 심리치료 관점으로 연결되는 느낌이에요. 미국에 있을 때, 지역 잡지 기자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그 기자가 저에게 했던 말이 잊히지 않아요. 저의 이야기를 들은 기자가 이렇게 말했어요. "It's all connected". 대학원 졸업 후엔 선험적 언어시스템을 찾고자 했던 그때와 다시 연결될지도 모르겠어요. 


1) 촘스키 Noam Chomsky (1928~ ) 언어학자 MIT명예교수 : 내재주의 (언어는 선험적으로 내재된 언어학습시스템을 통해서 학습된다고 봄) / 스키너 Burrhus Frederick Skinner (1904~1990) : 언어 행동주의 (언어는 경험을 통해 학습된다고 봄 / 행동-보상-강화) /
피아제 Jean Piaget (1896~1980) 스위스의 심리학자 : 상호작용론 (언어능력은 인지능력이 발달하면서 자연스레 커진다고 봄) 


결국 같은 세상에 사는 것 같지만, 모두 다 각기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로저스도 이러한 현상학적 기반에서 상담기법을 펼치고 있는 듯합니다. (아직 공부의 깊이가 짧아서 지금까지 파악한 내용을 기반으로 말씀드립니다.) 훗설의 인식론에 기반한 현상학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론적 관점의 현상학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로저스의 상담기법엔 현상학적 시간의 개념이 지평으로 깔려 있는 듯합니다. 로저스의 상담기법을 현장에서 활용한다는 게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현상학을 이해하는 것이 분명 도움이 되지만, 이론만으론 어려울 듯하고, 상담자 스스로가 시간개념을 포함한 현상학적 장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현상학적 깨달음이 바탕이 될 때 로저스의 상담기법을 온전히 소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상담심리 학자인 로저스를 포함한 많은 철학자들이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했듯이, 언어학을 하면서도 창조적 상상력을 기르기 위해 언어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바라볼 수 있는 통찰을 기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제가 사진을 공부하고 지금 사진으로 먹고살고 있는 바탕엔 이러한 무의식적 마음의 움직임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언어 밖의 세상을 자극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진을 선택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사진학교에서 사진기술을 연마했지만 결과물로서의 사진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사진을 행하는 과정과 결과물인 사진작품을 바라보는 '보는 방식 a way of seeing'에 대한 탐구에 더욱 매력을 느끼고 있고, 대상을 주관적으로 재해석해서 바라보고 그것을 카메라를 통해서 담아내는 예술적 행위가 사람의 마음에 어떻게 작용하는지가 저의 관심인 것 같습니다. 


ㅤ 

인상적이었던 이론들


저에겐 모든 이론들이 낯설고 힘겨운 만남이었지만, 어느 하나 인상적이지 않은 이론과 사상들은 없었습니다. 학기 초에 정신분석학에서는 아들러가 좀 더 직접적으로 친근하게 다가왔고, 융의 정신세계 지도는 현상학을 비롯한 실존주의 철학을 기반으로 펼치는 이론들을 접할 때면 늘 떠올리게 되는 이론이었습니다. 로저스의 인간중심 상담과 펄스의 게슈탈트 상담이론을 접했을 때는 현상학적 장에 펼치는 심연의 욕구에 대한 알아차림에 매우 매력적이었고, 특히 게슈탈트 이론에서 그 현상을 알아차리는 방법으로 감각기관으로부터 무의식적으로 표출되는 비언어적 현상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나탈리 로저스의 인간중심 표현 예술치료에서의 알아차림과 같은 맥락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유기체적 경험과 자기 개념과의 불일치에서 오는 고통의 해소로 로저스는 유기체적 경험을 온전히 수용해서 유연한 사고로 자기 개념과 통합해서 안과 밖이 분리되지 않고 통합된 자아로 발전적으로 나아갈 것을 말하고 있어요. 융이 말하는 자기실현과도 다르지 않아 보였고요. 펄스의 게슈탈트 역시 마찬가지고요. 나와 환경의 경계를 말하고, 모호한 회색지대의 경계에 머무르지 않고 접촉과 물러남을 통해서 명백한 깨달음을 얻길 바라고, 내면의 세계에서 떠오르는 환상과 외부세계가 일치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 즉 분리된 성격의 통합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선 로저스와는 기법적인 접근법에서 차이는 나지만 결국 치료적 의도와 방향은 다르지 않아 보였습니다. 저의 행동변화를 촉진시킨 이론은 벡을 접하고부터였고, 그리고 어쩌면 가장 많이 마음이 쏠린 이론은 실존적 심료치료인 듯합니다. 아직은 표면적인 느낌만 있는 수준이지만 방학 동안에 프랭클의 ‘Logotherapy’를 중심으로 한번 빠져 보고 싶어 졌어요. 사진이 뭔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논문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진이 저의 스페셜티라 할 수 있으니, 사진을 매개로 한 연구를 이어가고 싶어요.  



아들러/엘리스/벡/로저스/게슈탈트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한 때 유행을 했었죠. 저는 그때도 '아들러'라는 이름을 알지 못했습니다. 대학원에 입학한 후 프로이트, 융과 함께 정신분석 심리학의 트로이카 중의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의식 너머의 세상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저는 정신분석학 자들의 이론이 매력적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무의식에 대한 생각은 사진을 하면서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 2)의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는 말은 저를 전율케 했고, 마크 로스코 3)의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의 영적체험이 무엇인지 공감하면서 역시 전율하였습니다. 페터한트케 4)가 자신의 개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은 이유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었습니다. 


트로이카 3인방의 이론은 매우 흥미로웠지만, Reflection paper에는 그중에서 아들러를 선택했습니다. 제가 살아온 삶의 방식에 힘을 실어주는 그의 이론이 위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나고 보면 항상 과거의 선택에 대해서 후회하게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저는 과거를 잘 돌아보는 성격은 아니라서, 아무리 힘들어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어쩌면 회피이고 외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공부하면서 들기는 했습니다. 일종의 자기 방어인가?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고요. 하지만 아무리 낙천적으로 현실적으로 살아가고 미래지향적인 삶을 산다고 해도, 몇몇 과거는 늘 아쉬움으로 남아서 회피하려고 해도 계속 어떤 유사한 상황을 만나면 트리거가 작용해서 반복적으로 그때의 상황이 떠올라 후회되고 괴로운 순간이 찾아오곤 합니다. 저에게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TSD가 있었던 거는구나란 생각도 하게 되었죠. 


저는 이러한 마음의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늘 이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지금의 나의 실패는 더 큰 성공을 위한 필수 요건의 하나일 거야'(일종의 중간 신념이었던 거죠)라고 생각하면서, '과거의 나의 잘못된 판단으로 실패처럼 보이는 나의 스토리는 꼭 성공 스토리로 바꿀 거야'라는 생각으로 버티면서 살아왔어요. 하지만 이것은 나 스스로의 합리화로 여겨지고, 이런 합리화는 다시 비슷한 환경에 놓였을 때 그 '핵심신념'은 변하지 않아서 비슷한 대응으로 다시 후회하는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반복되었습니다. 이것이 엘리스 가 말하는 ‘비합리적 신념’, 벡의 ‘역기능적 신념 schema’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합리화를 해보고, 이런 식의 마인드 컨트롤은 나의 신념을 유지한 채 앞으로 나아가는 데는 분명히 도움을 주지만, 마음속에서 반복적으로 외치는 '낙오자' '실패자'라는 외침에서는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2) 비트겐슈타인 Ludwig johann Wittgenstein (1889~1951):언어철학/분석철학 대표저서 '논리철학논고'
3) 마크 로스코 Mark Rothko (1903~1970) : 러시아 출신의 미국화가. 추상표현주의 대표적인 예술가
4) 페터 한트케 Peter Handke (1942~) : 오스트리아의 극작가 / 소설가 대표작 ‘어느 작가의 오후’ 2019년 노벨문학상 수상. 


그런데 아들러의 이야기를 접하고 나서는 조금은 제가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생각한 과거의 일들을 저는 감추고 변명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성공을 위한 필연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충분히 훌륭하지만, 그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분석해서, 유사한 환경이 닥치면 과거의 오류를 범하지 않겠다는 생각보다는, 핵심 신념에 여지없이 갇혀 또다시 오류를 반복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낡은 핵심 신념 체계로 잘못 해석된 퀄리티 낮은 저만의 Quality world와 자각한 세상과의 괴리는 경험이 축적되어도 간극을 좁힐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과거 그때의 나의 잘못된 판단을 타당하도록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 지금의 나로 돌아와서 현실적이고 냉정한 판단 하에 가상의 미래를 재설계하고 이미지화해서 나의 목표에 다가갈 수 있도록 현실적인 노력을 경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아들러를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경험이 축적되고 있는데 제 안의 가상의 신념체계는 이미 유통기한을 넘겼습니다. 저는 이렇게 꼰대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들러를 통해서 저는 저의 인지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긴 했지만, 행동의 변화로까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들러를 통해서 위로를 받았다면 현실적인 제 자신에 대한 발전적인 치유와 행동자체의 변화로 이어진 것은 벡의 인지치료를 학습한 이후 인 듯합니다. 벡이 제시한 이익-불이익 기법이 ‘아하~’하고 저의 행동변화를 일으켰고,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고 요즘 삶의 태도에 도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아들러와 엘리스를 공부했을 때까지 저는 저의 비합리적인 신념체계를 온전히 받아들이진 못했던 것 같고, 계속 변명하면서 비슷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 상황을 튕겨 내거나 왜곡시켜 역기능적 신념을 그대로 유지해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생각은 틀림없다고 여겼던 것 같아요. 저의 중간신념을 보면 보상전략으로써 반대전략을 사용하고 있는 듯합니다. ‘실패를 반드시 실패가 아닌 성공의 필연으로 만들겠다’는 저의 중간신념은 비슷한 환경에서의 경험들에 대해 과잉반응을 불러일으켰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에 좌절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선 표면적으론 이상적으로 보였지만, 속 깊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느낌이에요. 아픔은 반복되었으니까요. 이건 로저스의 이론을 적용해 봐도 유기체적 경험을 온전히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것이고, 밀런 million 이 말했던 자기 영속화(self-perpetuation)를 실현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시 게슈탈트를 적용해 봐도 인격적으로 분열된 저의 부분과 속 대화를 해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들러부터 게슈탈트까지 모두가 사실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게 되었어요. 글을 적다 보니 많이 길어져서 수업을 통해서 알게 된 이론가들에 대한 개인적인 리플렉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ㅤ 


수업후기

사진촬영과 사진교육을 하면서 관심이 증폭된 사진치료/치유 부문의 활동을 위해 석사학위 증 정도 만들어놓으면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에 가벼운 맘으로 입학했다가, 101 수업을 들으면서 점점 매력에 빠져들었고, 마지막 단원의 실존적 심리치료 수업을 들으면서는 사진매체를 활용한 실존적 심리치료의 방법적인 연구를 하고 싶은 심한 자극을 받았습니다. 또한 101 개론 수업은 저의 삶의 태도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관찰학습을 통해서 학습된 이론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못하는 이유가 자기 효능감(self-efficacy)과 보상적 결과에 대한 기대(outcome expectancy)가 모두 충족되어야 가능해진다고 말씀해 주셨잖아요? (*이건 여담인데요, 저는 반두라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을 때, 인도식 치킨 ‘탄 두리’가 자꾸 떠올라서 수업시간에 배가 좀 고팠습니다. 저에겐 두 가지 모두가 만족할 수준으로 충만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자기 효능감’은 실패의 기억으로 형성된 역기능적 신념은 과잉된 중간신념을 만들게 되었고, 결과에 대한 강박과 불안에 까지 영향을 미쳐, 인지를 왜곡하거나 회피하고, 도전적이지 못한 안전한 수준의 도전만을 수행했던 것 같습니다. 증상에 대해 각기 다른 식의 접근을 하고 있지만, 결국 사람의 마음을 다루기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는구나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말씀하신 개별 이론의 적용보다는 입체적으로 내담자를 상담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아주 조금은 이 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론가들 사상가들의 생각을 고찰하고 이해해 보려고 애쓰는 이유도 알 것 같습니다. 역시 저의 인생의 여정만 It’s all connected가 아니라, 학문도 결국 하나로 다 이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상담심리학의 저의 첫 스승님이 되어주셔서 영광이었고, 감사했습니다. 저에게 사진을 가르쳐주신 첫 스승인 Robert sky bradshow 교수님이 교수님과 중첩되어서 떠오릅니다. 



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