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판서 좀해야겠어요.
어느덧 4~5년 전의 흔적이네요. 수업하면서 화이트보드에 적었던 내용을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보고,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있어요. "지금 수업 땐 더 많은 내용을 수업하고 있니?" "내용의 발전은 있니?" 아니면 "그때의 생각과 달라진 부분은 없니?" 반성하고 있어요. 오히려 수업 내용이 적어진 것 같아요. 사진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최적의 길로 간다고 해서 전부는 아닌 것 같아요. 돌아서 가기도 하고, 정반대의 길로 가 보기도 하면서 그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는 내 머릿속의 지도를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 사진인 것 같아요. 그런데 최적의 길만을 안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고 있어요.
화이트보드 왼쪽에 보면 수직으로 찍찍 그어 놓은 것이 있어요. X 표시도 해두었네요. 그 길로 가지 말라는 거예요. 하지만 저는 정리된 다른 길을 요즘 안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게 생각해보고 있어요. 스스로의 길을 찾도록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수직의 저 길을 대체할 다른 최적의 길을 제가 임의로 안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어요.
수강생들에게 더 다양한 코스로 안내하고 자극해야 하는데, 안내하는 길의 가짓수가 줄어든 것 같아요. 화이트보드를 다시 보니 그때 수업 때 강의했던 내용들이 떠올라요. 공부해야겠어요. 더 다양한 예로 자극해야겠어요.
내용뿐 아니라 형식에서도 변화가 생겼어요. 이렇게 화이트보드를 사용하는 빈도가 크게 줄었어요. 판서하는 시간을 아껴서 더 많은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있어요. 하지만 한 글자씩 천천히 화이트보드에 써 내려갈 때 수강생 스스로가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시간이란 점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우연히 발견한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스튜디오 겸 교육장인 제 작업실의 레이아웃을 다시 수정하려고 해요. 사진은 결국 공간과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공간에 떨어지는 빛이 사물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나도 함께 느끼면서 그 공간의 일부를 담아내는 작업이죠.
카메라의 기능을 익히기 이전에, 혹은 고화소의 카메라와 질 좋은 렌즈가 좋은 사진을 만들어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먼저 하기보다는, 사진을 찍지 않더라도, 내가 바라보고 있는 대상에 대해서 어떠한 약속된 의미도 떠올리지 말고, 오로지 떨어지는 빛과 질감만을 느끼는 시간을 먼저 가져보면 어떨까요? 생각보다 이게 쉽지는 않습니다. 이게 되면 사진 찍는 게 즐거워질걸요? 무엇으로 찍던지 간에요.
물론 저는 카메라와 렌즈가 매우 중요해요. 어떤 카메라와 렌즈로 촬영하는지도 중요하죠. 저는 상업사진 가니까요. 사진 품질개선과 업무 효율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며칠 전에 새로 카메라와 렌즈를 구매했어요. 필요한 수준만큼만 카메라와 렌즈를 구매했어요. 상업 사진가는 무턱대고 플래그쉽 카메라를 구매하진 않아요. 딱 필요한 만큼만 투자하죠. 취미 사진가에겐 장비에 대한 만족도 역시 취미활동의 일부일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취미 사진가들의 장비가 더 훌륭한 경우도 많아요.
요즘엔 온라인 실시간 줌 수업에 대해서도 고민이 늘었어요. 현실을 발을 디디고 한 공간에서 함께 호흡하며 진행하는 수업과는 분명히 다를 텐데, 각자의 아날로그 공간에서 랜선으로만 연결된 사이버 세상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사진 수업에 어떻게 작용할지... 시도는 해봐야 알 수 있겠죠!
이번 달부터 기관에서 진행하는 수업은 녹화 수업과 실시간 줌 수업 등으로 강의 환경에 어쩔 수 없는 변화가 있을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