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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운 Aug 16. 2021

[책] 레몽 드파르동의 방랑

Raymond Depard

한달음에 읽어내려간 '방랑'

진짜 내 사진을 찾고 싶다면...

레몽 드파르동의 [방랑] 이란 책을 읽고 그의 다큐멘터리 영화 [프랑스 다이어리]를 이어서 보았습니다. 책을 영화로 옮겨놓은 듯한 [프랑스 다이어리]는 조금 오래전에 영화로만 1/3 정도 본 적이 있습니다. *순서는 상관없지만 책에서 영화로 이어지는 순서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번엔 책을 읽고 다시 보니 영상 속 그의 생각에 조금은 더 가까워진듯합니다. 책과 영화엔 그의 이력만큼이나 많은 역사 속 이야기들이 등장하지만 모든 것을 이해하기엔 역부족입니다. 스쳐 지나가듯 등장하는, 중요할 수도 있는 그의 과거 이야기들은 나에겐 그냥 스치는 남의 이야기로만 남았습니다.* 언젠가 좀 더 유식해지면 그 사건들을 볼 때 레몽 드파르동이 떠오르게 되겠죠.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전 남아공 대통령이었던 넬슨 만델라가 레몽의 요청으로 1분 동안 아무 말 없이 카메라를 응시하는 사진 같은 영상이었습니다. 보통은 사건의 낱낱을 알고 싶은 욕심이 들기 마련이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방랑]이기 때문에 그랬고, 그냥 그의 [프랑스 다이어리]이기에 그랬습니다. 진짜 사진이 무엇인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고자 하는 맘으로 읽어서 더 그랬습니다. 수업을 하면서 '주제가 명확히 잘 표현된 사진' 이란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문작가들의 사진 속 대상은 과감하게 큰 범위를 차지한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면서 다음 단계는 '주제가 명확하지 않은 사진일 수도 있어요'라고 슬쩍 말을 흘립니다. 주제가 명확한 사진이 더 좋은 사진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좋은 사진일 수 있다면, 방랑이란 책을 통해 혹시 그 해답을 찾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레몽은 강박적으로 대상에 대해 일정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책과 영화 속에서 보이고, 그도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영화도 그냥 돌아다니다가 끝이 납니다. 레몽의 차가 막다른 길로 들어서면서 끝나는 설정이 여정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듯하지만, 그 조차도 새로운 시작의 휴식 같은 느낌이라서 그냥 fade out으로 처리하면서 영상은 여기까지입니다.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어느 곳에서 시작하지도 않았고, 목표로 하는 도착 지점도 없습니다. 진짜 방랑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목적 없이 다니는, 심각하게 목적이 없어야 하는 이러한 여정에서 사진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레몽에게 주어진 미션이기도 했습니다. '방랑'을 사진으로 표현하는 것이었죠. 그 핵심은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나 찍을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사진들~

그러나 그곳에 가야만 찍을 수 있는 평범함 들.

그것의 기록이 '방랑'

영화에서는 그가 바라보는 시선을 담고, 사진처럼 보여줍니다. 책은 한 페이지는 글로 다른 한 페이지는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페이지마다 포함된 사진과 텍스트의 관련성을 찾으려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글이고 그냥 사진일 뿐입니다. 사진을 분석적으로 바라볼 이유도 없습니다. 지나친 콘트라스트에 거북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노출 과다를 걱정할 필요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때의 극적인 느낌을 표현하면 그만입니다. 좋은 구도에 대해서 학습하려고 달려들 필요도 없습니다. 그가 이야기한 그냥 일상의 순간뿐입니다.


결정적 순간은 없다.
일상의 순간뿐이다.
레몽 드파르동


하지만 레몽이 그린 그 일상의 순간은 느립니다. 마치 카메라가 만들어졌을 초기에 장시간 노출로만 이미지를 잡아낼 수 있어서 스냅사진이 불가능했던 사진처럼 그의 사진 속 일상은 비어있습니다. 장노출로 마치 대상이 모두 사라진 것처럼 비어 있습니다. 등장하는 사람도 주인공은 되지 못합니다. 어떤 사진 속에는 사람이 너무 작아서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초상권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어서 좋다고 그는 말합니다. 방랑을 사진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일종의 촬영 콘셉트일 수도 있지만, '방랑'이라는 주제가 아니어도 진짜 사진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주제 없는 사진...



주제는 창조적 사진에서 큰 장애다. 영화 창작에서도 마찬가지다. 형태와 미학, 시선의 힘이 지배한다. 우리는 그것으로 기억한다. 채트윈, 부비에 같은 기행작가들 모두가 줄거리 없는 책을 썼다. 줄거리가 있다면 바로 그들의 일상생활이다. [방랑, 60p]


그냥 그곳에 존재하는 빛과 그림자를 담아내는 것이죠. 그때 드러나는 형태와 질감이 나에게 어떤 자극을 주었다면 그때 셔터를 누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라보는 시선은 존재하지만 가능한 객관화하려는 애씀이 보입니다. 객관화하면 보는 이(Viewer / 감상자)는 창을 통해서 스스로 바라보는 것처럼 대상을 살피게 됩니다. 주제가 드러난 사진은 촬영자의 시선이 느껴집니다. 그가 힘주어 바라보는 것에 이끌리게 됩니다. 동의와 부동의를 이끌어내려고 애쓰는 사진을 만나게 됩니다. 촬영자의 생각을 읽어낼 것을 강요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방랑> 속의 사진들은 그저 바닥의 돌멩이 하나하나를 살펴보게 되고, 멀리서 지나가는 행인을 길 건너에서 그냥 시간을 때우며 바라보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모조리 흑백사진이라는 것 만이 일상을 비현실로 만들고 있습니다. 사진을 바라보게 하는 남아있는 마지막 장치처럼 느껴집니다.


<방랑>에 주제는 없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옹호하지도 부자를 고발하지도 않는다. 나는 구름을 찍고 땅바닥을 찍는다.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또 너무너무 잘 보고 있다. 나는 그렇게 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돌아다니며 보아야 했다. <방랑>은 내가 난생처음 주제와 줄거리에서 벗어난 작업일 것이다. [방랑, 60~62p]

보도사진 기자로 오래 활동한 그에겐 가난한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해서 그 실상을 알리고, 부자들의 허영을 사진으로 극대화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을 완성하려고 애쓰던 시절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 사진들이 퓰리처상을 수상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는 방랑에서는 그냥 구름과 땅바닥을 찍습니다. 등장하는 인물이 있더라도 이미 객과화된 시선에선 그들을 이용한 어떤 메시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처음으로 주제와 줄거리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난 작업이라고 했습니다.




주제에 대한 강박..

나 역시도 주제에 대한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사진을 시작했던 그때는 세상의 모든 것이 사각 프레임 속에서 의미를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강의할 때 '사진은 시작이 중요합니다.'라는 말을 종종 합니다. 사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던 그때, 처음 카메라를 들고 숙제를 하고 사진을 찍기 위해 돌아다닐 때, 나는 진짜 사진을 했나 봅니다. 하지만 사진을 공부하면 할수록 사진을 찍기보다는 주제를 세우고, 그럴듯한 플롯으로 극적인 이야기를 쥐어 짜내려 애썼고, 그러한 특별함이 나의 논리와 맞아떨어지지 않을 땐 셔터를 누를 수조차 없었습니다. 심지어 스스로도 그렇게 완성한 사진을 보면서 위장이 뒤집어지는 역한 고통에 작업을 중단하고 사진을 찍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Ordinary Vs Extraordinary

평범한 것은 그냥 평범한 채로...

사진학교에서 첫 PHOTO101수업을 들었던 그때, Robert 교수님은 '평범한 것을 특별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맞습니다. 이것이 작가적 시선이겠죠. 저의 첫 단행본 '아기사진무작정따라하기'에서도 이 이야기를 언급했었습니다. 작가적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지나치게 평범해 보이는 일상에서도 특별함을 찾아낼 수 있겠죠. 그래서 우리는 '낯설게 바라보기'라는 훈련으로 작가적 시선을 훈련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방랑>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애써 특별함을 찾아 작가적 시선에 가두기 보다, 평범해 보이는 것은 평범한 채로 그냥 그렇게 담아내면 안 될까? 특별하게 표현되지 않으면 사진작가가 찍기엔 부족한 사진일까? 작가적 시선에 대한 강박이 진짜 사진을 못 하게 하는 건 아닐까? 나에게 의미 있는 사진은 도대체 무엇이지?


세상의 고통과 기쁨에 기대려 하지 않으니까... 무슨 '베일'이라도 들추는 척하고 싶지 않다. 이 나라, 저 나라의 모순과 부자와 가난한 자를 폭로하는 척하고 싶지 않다. [방랑, 68p]

이번이야말로 내게 이토록 명쾌한 주제는 없었다. 아무 주장도 하지 않는다. [방량, 70p]


책에는 방랑 사진에 대한 그의 생각들이 도처에 흩어져 있습니다. 기-승-전이 없습니다. 그냥 아무 곳에 버리듯 있어요. 읽으면서 밑줄 친 곳이 많지만, 여러분들의 밑줄은 다를 수 있겠죠. 그와 책으로 동행하면서 나의 사진에 대한 많은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이젠 방랑할 용기만 장착하면 될 것 같습니다. 사진을 처음 시작했던 그때처럼 말이죠.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는 다르게 책의 마지막 사진은 막다른 길로 보이진 않네요. 과거를 보는 것인지 계속될 방랑의 미래를 보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책의 마지막 사진을 보고 떠오른 제 사진을 함께 올립니다. 사진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나의 첫롤을 지금에 와서야 그렇게 찍고 싶어지네요. 잘 안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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