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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운 Mar 14. 2022

메타언어

말을 어디에 태워 보낼까?

언어는 때로 그 말이나 글 자체의 의미 이상의 울림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음악에 실려 들릴 때도 그렇고, 시나 소설 같은 문학작품으로 다가올 때도 그렇다. 그뿐 아니라 각자의 고유한 목소리를 통해서 전달될 때도 사람마다 다른 울림을 전파한다.


약속된 소통의 도구인 언어 그 자체는 분명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어디에 실려서 전달되는가에 따라서 언어는 우리의 오감을 자극한다. 감각을 자극한다는 것은 사람마다 느끼는 감각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전달받게 되는 의미 또한 같을 수가 없다. 언어가 말로 전달되는 순간 이성과 감성의 경계를 넘나 든다.


우리는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더 큰 세상을 머릿속에 분명 그리면서 산다. 좋아하는 과일의 맛을 표현하지 못해 손짓, 발짓, 온몸으로 맛있음을 과장한다. 너무도 귀여운 아기를 보았을 때, 혹은 강아지를 보았을 때 우리는 "너무 귀여워" 이상의 단어를 찾지 못해, 말을 반복하거나, 된 바름도 안 되는 '너무'에 엄청 힘을 주어서 말하거나,  몸을 떨거나 손을 움켜쥐기도 한다. 이렇듯 분명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감정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산다. 그 영역을 탐구해 보자.


말을 하지 않고 생각해보기를 시도해보자. 불가능하게 느껴질 정도다. 표현할 수 없는 것에는 상상력을 발휘하기가 쉽지는 않다. 말의 힘을 빌리지 않고 어떤 생각을 떠올린다는 것이 쉽지 않다. 내일 할 일도 우리는 한국어로 말하면서 계획을 세운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자신의 모국어의 범위까지 생각할 테고, 배움이 많다면, 좀 더 넓은 범위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언어가 쳐둔 굴레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 굴레 밖의 더 큰 '사고의 바다'가 우리 모두에게 분명히 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한다.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지는 못한다' 우리의 생각을 구속하는 언어의 굴레 밖의 공간이 얼마나 클지는 모르지만 언어가 제한하는 영역보다는 아주 아주 훨씬 클 것임에는 분명하다. 


창조적인 상상력은 그곳에 숨어있을 것이다. 창의성을 키우고 싶다면, 그 영역을 건드리기 위해 노력하면 좋을 것이다. 




언어는 우리의 생각을 구속하지만, 언어가 실리는 다양한 도구들은 그 틀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언어는 약속된 법칙 속에서는 매우 논리적이지만, 음악, 시, 소설, 또는 우리들의 목소리에 실렸을 때, 논리와 비논리, 의식과 무의식, 이성과 감성 사이를 제법 자유롭게 오고 간다. 음악이 좋다는 것을 우리는 표현하지 못한다.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들어보면 알아~" 

"어때? 좋지?"

"어 좋아~"


내가 좋아하는 그 느낌을 친구가 느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표현한들 그 느낌 자체를 공유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그 음악에 실린 언어는 논리적인 말 자체의 뜻을 넘어서 그 무언가를 감각적으로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닭살이 돋기도 한다. 이것이 공감이다.


누군가의 말에 위로가 되었다면, 그 언어는 분명 제법 근사한 탈 것에 실려온 것이다. 반대로 내 마음을 상대방에게 잘 전달하고 싶다면 언어를 어디에 태워서 보낼지를 고민하면 좋겠다. 사실 내 마음을 그대로 전달할 방법은 없을지도 모른다.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언어 그 자체는 우리가 서로 약속한 규칙이지만, 표현되었을 땐 언어는 메타 메시지를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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