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스튜디오를 이전했어요. 10월에 이전했는데 해를 넘겨 이제야 맘 쓸 여유가 생기네요. 그 바람에 대학원 공부도 휴학하고, 3월부터는 다시 복학하려고 오늘 대학원 포털사이트에 접속하니, 복학신청기간을 넘겨버렸네요. 참, 계획 없이 살고 있습니다. 내일은 학교 행정실에 전화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꼭 만들고 싶었던 공간이에요. 사진집과 사진 관련 책들을 전시해두고 싶었어요. 덕분에 제 책도 전시하고 사진집을 살펴보는 고객이 있을 땐 슬쩍 홍보하기도 하죠. 사진집이면 좋으련만 그냥 실용서라서 조금 아쉽긴 해요. 사진으로 말해야 하는 작가가 글이 너무 많아요. 사진집도 출간하고 싶은데, 글쎄요~ 아직도 제 사진을 하는 건 때가 아닌 건지, 사진을 잘 찍지 못하네요. 다른 작가들의 사진을 보면 자꾸 심장만 뛰네요.
오늘은 무슨 정신이 들었는지, 브런치에 글도 쓰네요. 인테리어로 책장을 준비하면서 안목 출판사에서 사진집 한 권을 구매했어요. 필립 퍼키스 사진작가의 멕시코라는 사진집이에요. 아무리 사진이 좋아도 끌리는 사진작가는 따로 있는 건지, 제 마음에 들어온 몇 안 되는 사진작가죠. 인간관계의 폭만큼이나 사진가에 대한 식견도 좁네요. 전시만 해두다가 오늘은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살펴보았어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 같은 세상에 굳이 사진집으로 사진을 볼 필요가 있을까? 일반 도서는 종이 책 보다 전자책으로 주로 보고 있거든요. 무슨 이유로 난 아직도 사진만큼은 사진집으로 보는 것이 더 좋을까?
그래서 사진집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보았어요.
1. 눈이 편하다.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에요. 컴퓨터로 오전 내내 촬영본을 현상하고 보정한 후라서 휴식이 필요했어요. 눈을 쉬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소파에 앉았는데, 사진집을 집어 들었죠. 눈은 쉬지 못했지만, 눈의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었어요. 모니터로 사진을 감상했다면 일하는 느낌의 연속이었을 것 같아요. 흑백사진은 눈을 편하게 해 주네요. 사진 속 멀리 보이는 풍경은 실제로도 제 눈이 멀리 보는 걸까요? 눈은 사진 속 경치를 보면서 쉬고 있는 것 같았어요. *종이 사진 속의 밝은 영역은 모니터로 본 사진의 밝은 빛과는 달라요. 인화된 사진의 가장 밝은 영역은 그냥 흰색종이일 뿐이죠. 그래서 사진집은 자극적이지 않아서 좋더라고요.
2. 밝기 조절이 필요 없어요.
작가가 의도한 노출과 대비를 아무런 방해 없이 느낄 수 있어서 좋아요. 내 모니터가 표현하는 색공간의 차이도 작가의 작품을 방해하지 않아서 좋고요. 일부러 모니터의 밝기를 조정해 가면서 보지 않아도 돼서 좋아요.
3. 조용해도 지루하지 않아요.
이건 아마 저한테만 해당되는 느낌일 수 있어요. 저는 모니터로 사진을 볼 때는 고립감, 소외감, 적막감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모니터로 보이는 사진에 집중하기 위해서 조명을 어둡게 하거나 주변의 소리를 차단하면 잠시동안 집중하는 데는 도움이 되는데, 곧 외로움이 몰려와요. 음악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유튜브 뮤직을 틀어버리면 그 순간 사진은 음악의 배경이 되어 버리죠.
그런데 사진집으로 사진을 볼 땐 오히려 음악을 끄게 되네요. 조용히 책장을 넘겨요. 책장 넘기는 소리가 날 정도로 주변이 조용하면 좋아요. 창밖에서 나는 알 수 없는 소리나, 히터가 돌아가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다른 이들의 웅성임 모두 다 사진의 배경이 돼요.
4. 세상을 휘어서 볼 수 있어요.
책장을 한 장 한 장 조심스레 넘기다 보니, 세상이 휘어져요. 그 휘어짐을 보다가 못 본 부분을 발견하기도 해요. 스크롤 다운하거나 마우스 클릭으로 사진을 순간 넘기는 느낌과는 많이 달라요. 다음 세상으로 가는 과정이 없어요. 어떤 사진은 미련을 두고 다음 사진과 비교해서 언뜻 보면서 넘기기도 하고, 앞 뒤로 비교해 가면서 감상하기도 해요. 순간이동하는 클릭과는 다르네요.
5. 순서가 있고, 끝이 있어서 좋아요.
온라인도 순서가 있는 경우도 있고, 끝도 당연히 있어요. 하지만 클릭하다 보면 더 이상 넘어가지 않을 때가 끝이죠. 끝은 갑자기 찾아와요. 아무런 준비도 안되었을 때 와요. 정말 순서대로 보겠다는 마음으로 웹에서 보지 않으면 온라인에선 순서를 잘 고려하지 않아요. 하지만 사진집은 작가의 순서가 정해져 있어요. 그와 함께 걸어가는 느낌이에요. 다 와간다고 작가는 내 손의 촉감으로 알려줘요. 사진집에선 작가와 손잡고 걸어요. 다와 가면 손을 꼬옥 잡아주죠.
6. 사진 테두리를 보게 돼요.
모니터로 사진을 볼 땐 눈이 부셔서 그런지 사진의 중심을 주로 봐요. 사진집으로 보면 사진과 종이의 경계면까지 살피게 돼요. 사진을 공부한 후로 사진테두리를 보게 되는 습관이 생겨서 그런지도 몰라요. 하지만 모니터론 그렇게 안 돼요. 경계가 크게 의미가 없는 웹상에선 모니터로 눈을 가까이해서 경계면을 보지도 않고, 크게 확대해 보면 그냥 픽셀이거든요. 진품이 갑자기 가품이 되는 것만 같아요.
7. 인화지의 질감을 촉감한다.
사진이 일이다 보니 인화지 질감에 예민하긴 해요. 사진작가가 사진집을 출간할 때, 사진작가는 물론이고, 출판사에서도 어떤 종이를 사용할지 고민이 많을 텐데요. 그런 고민의 흔적을 촉감으로 느낄 수 있어서 좋고, '작가와 출판사는 왜? 이런 느낌의 종이를 선택했을까?'를 생각하면서 작품과의 관련성을 읽어내는 재미도 있어요. 종이를 문질러도 보고, 아주 가까이 프린팅 된 사진을 들여다보았을 작가와 같은 호흡인 것처럼 나도 들여다봐요.
8. 사진집 자체가 작품으로 다가온다.
웹에서 살펴보면 작품만을 보게 되고, 그것도 작품의 내용에만 집중하게 되지만, 종이 사진집을 볼 땐, 사진 밖 종이 여백까지 시선이 이끌리고, 챕터마다 다른 질감의 종이 간지가 있다면 그 간지 역시 살펴보게 되더라고요. 사진집 겉표지의 질감과 컬러, 속지의 옅은 미색, 다른 색상과 질감의 반투명 간지 등, 사진집을 통해서 사진집을 바라볼 땐 오감으로 볼 수 있어 감각이 살아남을 느껴요.
9. 캡처가 되지 않아요.
원본에 대한 부담이 없어요. 디지털 원본을 보장받기 위해 NFT발행이 필요 없어요. 전기가 없어도 사진을 볼 수 있죠. 종이를 쓴다는 것이 환경적이진 않지만, 디지털보다 오히려 친환경적이죠. 나의 손 때가 묻은 사진집은 세상에 단 하나뿐이기도 하고요.
10. 같이 세월을 함께해요.
사진집 속의 사진이 디지털 사진과 확실히 다른 점은 세월에 대한 반응인 것 같아요. 디지털은 나이가 들지 않지만, 사진집은 저와 함께 나이가 들어서 좋아요. 시간이 지날수록 사진집의 종이도 슬슬 나이가 들기 시작하고 오랜만에 사진집을 열어보면 종이냄새도 조금씩 달라져 있어요. 중성지 박스에 습도를 잘 맞추어 보관하면 젊음을 오래 유지는 하겠죠? 그래도 분명 조금씩 늙어가겠죠. 우리랑 다르지 않아서 인간적이라서 전 좋아요.
11. 질투심이 들지 않아요.
왠지는 모르겠어요. 인터넷에서 본 사진이 너무 맘에 들면 질투가 막 생길 때가 있어요. 그 역시도 작품 활동엔 긍정적인 자극임에는 분명하지만, 순수한 맘에서 우러나는 작품에 대한 열정과는 조금 다른, 열등감이 만들어준 에너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사진집으로 보면 나도 사진가가 된 듯하고,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어떤 만족감이 생겨요. 너무 맘에 드는 사진을 보게 되면 질투하는 마음보다는, 심장이 두근거리고, "아~~", "와~~" 같은 탄식이 깊은 호흡으로 한숨처럼 터져 나와요. 이 역시도 작품활동에 대한 자극이긴 해요. 나도 그런 작품을 하고 싶으니까요. 하지만 열등감과는 분명 다른 느낌이에요.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다' '나도 그런 시선을 가지고 싶고, 그런 움직임을 가지고 싶다' 같은 자각에서 오는 긍정적인 자극이라서 사진집이 좋아요.
12. 사진집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면 여운이 남아요.
종착지가 잘 보이지 않는 인터넷에서 감상한 사진과는 확실히 달라요. 남아있는 사진장수가 줄어들고 있음을 느끼고, 우리의 삶처럼 헤어질 순간이 다가옴을 느꼈다가도 한 장 한 장의 사진 속에 매료되어 남은 페이지를 잊어버리기도 하고, 어느덧 다다른 마지막 페이지에서 호흡은 조금 거칠어져요. 그리고 사진집을 덮고 나면, 눈을 감고 한동안 생각에 잠기게 되는 그 여운이 '외로움'으로 다가올 때도 있지만, 정화되는 느낌이라서 사진집이 좋아요.
13. 냄새가 나서 좋아요.
사진집마다 냄새가 달라요. 디지털은 냄새가 없어서 좀 아쉽죠. 작가의 작품마다 묻어있는 잉크의 양도 다르고, 선택한 종이 특성도 다르니 냄새도 다르겠죠? 컬러사진과 흑백사진도 차이가 날 테고요. 작품이 만들어준 그 냄새로도 작가와 소통하는 것 같아서 좋고, 같은 공간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잠시나마 인정받는 사진작가가 된듯한 착각이 들어서 행복해요.
14. 작가를 내 방으로 초대할 수 있어서 좋아요.
인터넷으로 사진작품을 감상할 땐, 모니터 창 너머로 작가의 작품을 슬쩍 넘겨보는 느낌이 들어서, 그냥 지나가는 이방인 정도로 느껴지지만, 사진집을 들고 볼 땐, 작가가 내 방에 와서 저에게 작품 소개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좋아요. 이 공간은 내가 주인이죠.
15. 반복해서 볼 때마다 모든 오감으로 전해진 느낌이 달라요.
사진집의 무게감도 다르고,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도 다르고, 시선의 출발점과 끝지점도 달라요. 지난번과 똑같은 물리적 동작으로 절대 볼 수 없어서 늘 새로워요. 사진을 보는 모든 동작은 매번 처음이라서 좋아요.
수강생들이 가끔 질문할 때가 있어요. '전시회 가서 사진을 보는 이유가 있나요?' '어떤 방식으로 사진을 보는 게 가장 좋은가요?' '사진집을 사서 보는 이유가 따로 있나요?' 등 디지털 사진이 시작되면서 생겨난 질문들이에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질문에 어떤 답변이 떠오르시나요?
사진집을 보다가 언뜻 떠오른 15가지 생각들을 적어보았는데요. 좀 더 깊게 생각해 보면 더 많은 이유들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여러분들의 생각이 궁금해요. 댓글로 남겨주시면 이야기 나누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