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고집이 빚어낸 차별화

비오의 브랜드텔링 7. | 나라경제 2019년 7월호

by 비오

2002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올드 오클랜드 파머스마켓 한쪽 구석에서 제임스 프리먼(James Freeman)은 첫 손님을 위한 핸드 드립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일찍부터 찾아와 줄을 선 손님들은 한 잔에 10분 정도 걸려 추출하는 커피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기다림을 이어갔다. 품질 좋은 원두를 그라인딩 한 후 드리퍼에 부어 최대한 평평하게 만들고 가장 맛있게 추출되는 온도의 물을 포트에 넣고 커피 위에 빙글 빙들 돌리며 떨어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리퍼 아래쪽 서버로 맛깔난 갈색을 띤 커피가 내려앉는다. 추출이 끝나면 정성껏 컵에 담아 손님에게 건넨다. 제임스 프리먼은 길게 늘어선 줄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두르거나 생략하지 않았다. 물이 흐르는 속도대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나갔다. 마켓에 나가지 않을 때는 임대한 원예 창고 한편에서 오전엔 2.7kg 용량의 로스팅기로 원두를 굽고 오후에는 마켓을 찾던 손님들이나 카페를 운영하는 업주들과 커피에 관한 다양한 대화를 나누며 고객의 입맛에 맞는 원두를 생산해 낡은 푸조 웨건으로 직접 배달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했다.

‘블루 보틀(Blue Bottle)’은 이렇게 시작됐다. 블루 보틀이란 이름은 1686년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튀르크의 전쟁에서 공적을 세운 콜시츠키(Georg Franz Kolschitzky)가 전장에 남겨진 커피 자루를 상으로 받아 문을 연 오스트리아 최초의 카페 ‘푸른 병 아래의 집(Hof zur Blauen Flasche)’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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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프리먼은 로스팅 시간을 20초 간격으로 달리하며 그때그때 온도와 구워진 원두 상태를 기록해 최고의 맛과 풍미를 만들어 내는 프로파일을 찾았다. 우수한 품질의 생두는 자라난 토양의 특질을 담고 있어 산지별로 풍미가 다르기 때문에 모든 생두에 이런 과정을 되풀이했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생산된 원두의 맛을 선보이기에 핸드 드립만 한 게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정성과 시간을 들인 만큼 고유의 맛을 간직한 커피가 추출되기 때문이다.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10분 정도를 기다려야 함에도 손님들은 점점 늘어났다. 빠른 속도보다는 느리지만, 정성이 깃든 맛있는 커피가 가치 있다고 느끼는 고객이 모여들었다.

마켓을 품질 좋은 커피에 대한 경험을 제공하는 장으로 활용하면서 카페나 개인 고객에게 맞춤 원두를 배달하던 프리먼은 카페에 납품하는 일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아무리 품질 좋은 원두를 납품해도 카페에서 기존의 커피 메이커로 추출하는 방식을 고수하면 블루 보틀 원두도 다른 원두에 비해 좋다는 인상을 주기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켓에서의 경험과 개인 고객과의 강한 유대관계를 토대로 블루 보틀은 타깃을 커피 맛을 아는 개인으로 정하고 사업방향을 전환하며 2005년 캘리포니아에 블루 보틀의 첫 공식 매장 헤이즈 벨리점(Hayes Valley)을 연다. 동네의 흔한 개인 카페처럼 보였지만 커피만큼은 흔하지 않은 방식을 고수하며, 48시간 이내의 원두만을 사용해서 주문 즉시 분쇄해 핸드 드립으로 판매했다. 블루 보틀 1호점은 처음부터 흥행에 성공하진 못했다. 하지만 단골은 서서히 늘고 매출은 천천히 올라갔다. 블루 보틀은 가치를 아는 소수에 주목했고 프리먼은 그들과 우수한 커피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걸 기쁨으로 여겼다. 어느새 블루 보틀에는 소수의 마니아로 인해 팬덤이 형성됐고 그들의 입소문으로 언론이 주목하는 브랜드로 부상했다.

블루보틀 1호점 헤이즈 벨리점은 차고를 개조해 만들었는데, 뉴욕타임스 등의 언론이 “스타벅스가 마이크로소프트라면, 블루 보틀은 애플”이라고 보도했다. 이 때문에 블루 보틀은 ‘커피 업계의 애플’이라는 별칭을 얻는다.

브랜드의 말에 집중하고 경청하는 고객은 브랜드와 끈끈한 관계를 형성한다. 브랜드가 말하는 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귀담아듣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가 되기까지 과정은 느리고 더디지만 마치 핸드 드립이 맛있는 커피를 만들어 내듯 그 결과는 무척 맛깔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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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있는 고집

점포가 늘어나면서 블루 보틀이 추구했던 규칙은 다른 카페에 익숙했던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메뉴는 여덟 가지로 단출했고 산지별로 다른 커피의 향을 만끽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가향된 시럽을 사용하지 않았다. 최고의 맛을 선사하는 레시피 때문에 컵 사이즈는 하나로 통일했고 아메리카노 없는 핸드 드립을 고수했다. 다양한 취향을 가진 다수의 개인들에게 불편하게만 보이는 이런 규칙들은 품질 좋고 맛있는 커피를 원하는 이들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이해가 쉽다.

블루 보틀의 불편하고 고집스러운 규칙은 커피의 맛을 아는 이들을 블루 보틀로 초대했고 블루 보틀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은 커피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블루 보틀이 추구하는 가치가 스타벅스와 유사한 카페가 추구하는 가치보다 더 정제돼 보이고 우아해 보인다는 인식이 생겨난 거다. 블루 보틀을 찾는 이들은 새로운 경험을 SNS나 구전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파했고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색다른 커피를 경험하기 위해 블루 보틀로 향하고 있다.

2002년부터 현재까지 블루 보틀과 고객들이 보여주는 현상을 커피 업계에선 제3의 물결의 일부분으로 보고 있다. 제1의 물결은 인스턴트커피의 시대, 제2의 물결은 스타벅스를 중심으로 한 카페 공간의 시대, 제3의 물결은 품질 좋은 커피가 주인공이 되는 시대로 나눈다. 제1의 물결인 주역 네슬레는 2017년 블루 보틀의 지분 68%를 약 4900억 원에 인수했다. 네슬레가 블루 보틀을 인수한 배경엔 커피 사업을 하고 있음에도 프리미엄 커피 마니아들을 위한 창구가 없어서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다수의 대중을 타깃으로 한 거대 기업 네슬레가 이런 선택을 하는 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커피의 맛을 향하고 있다는 방증 아니겠는가.

혁신적인 브랜드는 지금은 없거나 보이지 않는 가치를 눈에 보이도록 실현해 낸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인식이 더디고 느리더라도 브랜드는 고집스러운 노력을 통해 눈에 보이는 가치를 만들어 낸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고객과의 소통이다. 브랜드가 향하고 있는 가장 큰 목표부터 세부적인 이야기까지 아낌없이 고객과 나누고 의견을 반영한다면 혁신은 더욱 정교해지고 브랜드의 성공과 성장을 지켜보며 흐뭇해하는 고객을 얻게 된다. 이들이 온·오프라인으로 실어 나르는 구전의 힘은 신뢰 구축이 어려운 세상에 강력한 힘이 된다.

혁신에 의한 불편함이 소통을 통해 각별한 애정으로 변모할 때 브랜드는 ‘차별화된 가치’라는 큰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된다.


참고자료

* 양도영, 「블루보틀에 다녀왔습니다」, 쓰리체어스, 2014

* 제이오에이치, 『매거진 B, No.76: Blue Bottle Coffee(한글판)』,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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