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의 길, 길 위의 사람
내 일터엔 길이 있다. 그 길을 걷는 것이 나의 일중 하나이다.
인생 전반부의 직업은 앉아서 하는 일이었지만 이제는 일을 하려면 길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난 행복하다.
내가 운영하는 카페에는 중앙을 관통하는 긴 바가 있다. 바의 안쪽은 바리스타 공간, 바깥쪽은 손님 공간이다. 손님을 위한 음료가 만들어지면 바 안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 나가서 손님에게 드려야 한다. 일을 하는 열두 시간 동안 주문 수에 비례해 걸음수가 정해진다.
길을 걸으면 생각이 떠오르고 걷는 동안 정리가 되는 것을 일찍부터 알았다. 어릴 적 유치원, 초, 중 등굣길 10여 년간 터득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걸을 수 있도록 설계했다. 짧다고 생각하면 짧은 길이지만 매일 12시간씩 조금 더 걷는 거리와 생각이 쌓인다면 마음과 체력이 더 단단해질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늘 같은 동선, 같은 걸음이지만 그때 그때 담기는 마음은 다르다. 어떤 때는 내가 만든 커피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이 담기고 어떤 때는 소심함이 다른 때는 피곤함이 담긴다. 미신 같은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 마음이 커피에 담겨 마시는 분에 입맛으로 느껴진다 생각한다.
세상의 길도 마찬가지다. 모든 길은 공평하게 놓여있지만 걷는 사람마다 담기는 마음이 각기 다르고 그 길에서 추억도 모두 다르다. 그리고 그 모든 마음들이 길에 쌓인다. 길을 걷다 보면 길이 생겼을 때부터 지금까지 걸으며 쌓인 사람의 마음이 보일 때가 있다. 길을 걷다가 어느새 그들과 대화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길’이란 단어 만으로도 설레는 것은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페인의 순례자 길에서 새벽마다 늘 설레었다. 순례자 길이 생기고 쌓인 지혜는 여기저기 흩어져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하루 평균 30Km를 걸어야 하는 그 길에서 열두 시간 정도를 늘 걸어야 했다. 과거에 걸었던 사람들이나 길가에 사는 사람들이 길 중간중간에 쉴 곳을 마련해 두었다. 넓적한 돌이기도 했고 일부러 만들어진 벤치이기도 했다. 그 길에서 영면을 취하게 된 이들도 있다. 그들의 사진과 함께 길 위에 새겨져 있다. 흘러온 세월만큼, 지나는 사람만큼 길에는 그 흔적이 남겨져 있다.
목적한 마을에 도착 즈음엔 다리와 발이 너덜너덜해진 모습으로 느껴지곤 했다. 마을에 도착해 씻고 밥을 먹고 나면 조금 전까지 고통은 모두 잊고 또다시 길을 걸었던 이들과 대화할 생각에 설렌다. 잠을 깰 정도의 고통스러운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오면 다리가 치유된 건지 다시 걸을 수 있을 만큼 나아진다. 그리고 다시 걷는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아쉬움으로 남는 게 있다. 그저 마냥 걷기만 했다. 무의식으로 스며든 생각과 길의 심상은 남아있지만 이제는 디테일이 떠오르지 않는다. 40일간의 소중한 순간들이 스멀스멀 없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기록을 남기고 글을 쓰기로 했다. 그때의 기억과 느낌, 심상이 사라지기 전에…
그렇게 마음먹은 지 7년 만에 길을 걸었다. 이번 길은 교토의 작은 길들이다.
점과 점사이에 선이 생기듯 장소와 장소 사이에는 길이 생긴다. 그 장소는 어떤 의미로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곳일 거다. 그런데 도시계획을 하는 이들이 관점을 바꾸고 길을 먼저 내놓고 공간은 사는 사람들에 의해 살아 숨 쉬도록 맡기는 방식으로 길을 만든 곳이 있다. 일본의 교토가 그렇다.
교토 길의 근간은 헤이안쿄의 바둑판 모양으로 만들어진 거리구획이다. 동서로 뻗은 길 ‘조(条)’와 남북으로 뻗은 길 ‘방(坊)’으로 길을 먼저 만들었다. 조와 방의 길들이 서로 교차한 곳에 사방 500m의 정사각형 구획이 만들어진다. 그 또한 방(坊)으로 불렸다. 이 방 안에 동서 3개, 남북 3개의 소로를 두어 다시 16개의 사각형 공간들이 만들어지는 데 이 공간을 마치(町)라 했다. 마치에 함께 사는 이들을 마치슈(町衆)라 했고 지어진 집은 마치야(町屋)이다. 마치슈들은 서로 돕기도 했지만 서로 경쟁하기도 했다. 마치는 삶들이 모여있었고 상업의 발달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렇게 삶과 삶이 어우러져 현재의 교토 모습이 되었다. 교토 마치슈와 같은 사람들에게 길은 숨통이자 소통 그 자체였다. 이 소로들을 걷고 싶었다. 마치슈와 마치야에 스며든 흔적들과 대화하고 사색하고 싶었다.
‘길’에 설레고 걷기를 좋아하는 스스로에게 ‘길’을 선물하고 싶었다.
인생이라는 ‘대로’를 바라보며
인생 후반부를 살아가는 나에게
사색이라는 ‘소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