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를 이용한 브랜드텔링
단어에는 역사가 있다. 단어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사람의 삶을 따라 변화해 현재의 모습에 이르기까지를 역사라 볼 수 있다. 단어의 어원(etymology)을 보면 그 시대 단어의 의미와 사람들을 더욱 명확히 느낄 수 있다. 단어는 사람들의 필요 때문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단어의 어원을 찾아보면 꽤 흥미로운 사실들을 발견할 때가 있다.
얼마 전 ‘물건物件’ 이란 단어를 찾아보고 재미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物’ 은 ‘소牛’가 ‘쟁기勿’를 끌고 가는 형상이다. 소가 땅을 갈고 거기서 수확되는 것들을 의미하는 것 같다. 농경사회에서 생긴 단어의 의미로는 적절해 보인다. ‘건件’은 ‘사람人’이 ’ 소牛’ 앞에서 끌고 가는 형상이다. 이 두 글자가 모여서 ‘물건’이 된다. ‘물’ 자 하나로도 충분한 의미가 되는 데 왜 ‘건’ 자가 합쳐져야 완성된 단어가 될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피터 드러커는 효율성 efficiency과 효과성 effectiveness에 대해 그의 저서에 서술한 적이 있다. 피터 드러커가 말하는 효율성은 ‘일을 옳게 하는 것 Doing the thing right’이고 효과성은 ‘옳은 일을 하는 것 Doing the right thing’이다.
두 가지를 오버랩시켜 보니 ‘소가 쟁기를 끄는 것’이 일을 바르게 하는 효율성에 관련된 것이고, ‘쟁기를 끄는 소를 사람이 인도하는 것’은 효과성에 관련된다. 두 가지 관점으로 ‘물건’의 의미를 살펴보니 ‘올바른 것을 옳게 만드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한자로는 경작하는 모습으로 ‘물건’이란 단어가 만들어졌지만, 유럽에선 ‘경작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cultura’는 culture의 어원이 되기도 한다. 의미는 다르지만 서로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단어는 태생적으로 그 안에 사람의 삶을 담고 그들의 삶 속에서 섬세하게 다듬어져 현재에 이르게 된다. 변화의 과정에서 단어는 같은 의미로 전해오기도 하고 본질적인 것은 간직한 채 말초적 의미가 변하기도 한다.
단어는 그 안에 사람, 삶, 사건, 이야기 등을
응축하고 살아 움직이며 무언가를 상징하는 유물이다.
감각의 박물학(작가정신, 2004)에서 다이앤 애커먼은 사람의 눈은 단어를 10분의 1초 만에 시각중추에 전달하고 받아들인 정보를 뇌에서 그동안의 경험과 비교해 의미를 이해한다고 말한다. 단어를 보거나 들으면 본능적으로 드러난 의미와 감춰진 의미를 해석한다.
브랜드텔링은 단어를 잘 선택해서 사용해야 한다. 단어 하나가 브랜드를 상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원이 변해 섬세하게 다듬어져 단어가 변화하듯이 브랜드텔링에 사용된 단어도 마찬가지이다. 브랜드가 하는 모든 일과 단어가 만나 새로운 의미의 단어가 재탄생한다. 그렇게 브랜드텔링은 단어만으로도 강력한 메시지를 보낸다.
디즈니랜드는 방문 고객의 경험을 변화시키기 위해 단어로 운을 띄웠다.
고객을 호칭하던 customer나 consumer란 단어를 쓰지 않고 집으로 초대한 손님을 의미하는 Guest라 바꾸어 부르도록 했다.
‘당신은 우리 집의 귀한 손님입니다. 따뜻하게 맞이하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직원을 부르던 staff이란 호칭을 바꾸어 공연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Cast라 부르도록 하여
’ 우리는 어디에서든 초대한 손님을 위해 재미있고 즐겁게 공연하는 배우입니다.’
라고 말한다.
초대한 손님을 우리 가족처럼 식구처럼 배려하며 대하고 디즈니랜드 곳곳에서 깨알 같은 공연이 펼쳐진다. 보는 사람도 행복하고 행하는 사람도 즐거운 우리 집처럼 따뜻한 공간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디즈니랜드에서 직원 중 일부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공연 의상을 입고 배우처럼 연기하듯 일을 했다고 한다. 청소하는 직원들이 어디서든 바닥에 디즈니 캐릭터 그림을 그리는 것도 같은 맥락인 듯하다.
디즈니랜드는 ‘home’이란 콘셉트를 만들고 브랜드 콘셉트에 초점을 맞춘 단어만으로도 훌륭한 브랜드텔링을 한 것이다.
브랜드 안에서 재탄생한 단어의 의미 변화는 브랜드의 정신과 그에 따른 행동 때문에 일어난다. 단어가 브랜드와 함께 온전하게 살아서 브랜드를 대표할 수 있으려면 그 안에 브랜드와 함께하는 사람을 향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계속해서 찾고, 사용하고, 사랑해 준다.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기술혁신으로 인간의 삶을 바꾸겠다는 ‘산업혁명’이 일어난다. 하지만 대량 생산된 제품들은 조악하기 그지없었고 이에 윌리엄 모리스를 비롯한 학식 있는 예술가들이 사람들에게 수공예가 지닌 아름다움을 기계가 빼앗아가지 않게 하기 위한 미술공예운동을 벌인다. 이때 등장한 예술 사조가 아르누보(Art Nouveau)이다. Art(예술)와 Nouveau(새로운)의 조합으로 한마디로 Art New라는 의미다.
인간을 향한 사랑에서 시작하여 인간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자연을 모티브로 한 새로운 양식이었다. 그리고 ‘Art Nouveau 아르누보’는 세기를 지나 시대에 따라 모습을 바꾸면서 현재까지도 회화 및 패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하나의 예술 양식을 지칭하는 단어가 된다.
90년대 중반엔 우리나라에도 ‘New’의 열풍이 분다. 어떤 제품이든 이름 앞에 ‘New’가 붙은 새로운 제품으로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능을 더했다거나 디자인이 바뀌었다든가 등을 이야기하며 가격을 조정하고 출시되었다. 당시 자동차 브랜드도 다 '뉴'를 붙이고 새롭게 출시되었다. ‘뉴 그랜져’, ’ 뉴 소나타’, ’ 뉴 코란도’ 등…
그런데
그 옛날 ‘Nouveau’는 지금도 살아 숨 쉬며 진화하고 사랑받고 있는데
그 새롭다던 ‘new’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보이는 것만 바꾼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은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