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파는 술집, 카흐베하네.

터키 Turkiye | 카페의 탄생

by 비오

15세기 말 예멘에서 ‘탄생’한 커피라는 상품은 와인을 금지한 이슬람에서 와인을 대신해 종교와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되고 16세기 초에는 메카와 메디나 등의 성지와 이집트 카이로의 모스크 등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음료가 된다.

16세기는 오스만튀르크의 세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들은 강력한 위세와 힘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터키라 불리는 오스만튀르크의 도시 이스탄불엔 1554년 하쿰과 샴스라는 시리아인이 커피를 판매하는 곳을 열었다. 이렇게 시작한 ‘커피의 집’은 슐레이만 2세의 치세시기(1566 ~ 1574)까지 600 곳이 넘게 생기게 된다.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1475년에 생겼다는 말도 있음.)

이후 유럽에선 터키의 ‘커피의 집’ 모습에 자신들의 흥취를 더한 ‘커피의 집’이 생겨나게 된다. 다른 문화를 만나 생겨난 유럽의 ‘커피의 집’이 이슬람적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술 없는 선술집, 카흐베하네(Kahvehane)

[그림1] 카흐베하네 풍경


후에 카페라고 불리게 될 ‘커피의 집’은 카흐베하네로 그 어원부터 흥미롭다.

카흐베하네(Kahvehane)는 터키어로 ‘커피 선술집’이다. 약간 이상하다. 어떻게 커피를 파는 데 선술집이지?

하지만, 역사적인 사실을 살펴보면 그리 이상한 이름의 조합도 아니다.

원래 hane(선술집)는 뒷골목에 자리 잡고 캐러밴(Caravan)과 비이슬람인들을 위해 존재했던 여관이자 술집이었다. 이슬람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알코올을 먹는 것은 금기였기 때문에 이곳은 외지인과 이슬람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공간이었다.

이슬람 종교인은 자신들의 집에서 가족과 함께 지낼 뿐 밖에서의 교류가 없었다. 이런 종교적인 부자유가 그들에게 결핍으로 느껴지고 있을 때쯤 와인이 범국가적으로 금지가 된다. 그 역할을 대신하여 등장한 것이 커피.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에 의해 숭앙받고 종교제의에 음용되오던 그 음료는 선술집에도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다가 와인이 금지된 이후로 선술집의 중심 메뉴가 된 것이다. 무언가 부족했던 이슬람 믿는 이들이 선술집을 드나들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1554년 하쿰과 샴스에 의해 만들어진 곳에서 시작하여 모든 선술집에 이르기까지 커피는 종교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마실 수 있는 음료가 된다. 그리고, ‘수피’에 의해서만 종교적 확실성을 인정받았던 커피가 이슬람에서도 종교적 정당성을 확보하면서 성지나 모스크로 가는 순례자 길에는 수많은 카흐베하네들이 줄지어 들어선다.


순례길을 따라 흐르는 검은 성수


[그림2] 메카로 가는 길


타지에서 온 순례자들은 이국적인 이 음료에 매료되었고 자신의 친구와 가족들에게 맛 보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갈 때 가져가기도 했다. 순례자 길은 다른 지역 신기한 상품들의 수송 통로였으며, 정보전달 통로가 되어 커피와 커피에 대한 정보가 이 길을 따라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 신비한 효능과 전해져 오는 이야기들은 성지의 신비로운 성수와도 같은 느낌으로 비추어지기까지 한다. 이 소식은 전 이슬람을 건너 유럽으로 퍼졌다. 게다가 그들이 커피를 마신 카흐베하네의 소식을 전해 들은 유럽인들은 새로운 이데아에 눈을 뜨게 된다.

이스탄불의 카흐베하네는 신분에 상관없이 사람과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알코올에 절지 않은 말짱한 정신으로 대화를 나눈 곳이 되었고 16세기 역사학자 이브라힘 페체비(Ibrahim Pacevi)는


사람들은 놀고 쉬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고 한다.


라는 말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그곳에선 사람들이 게임을 즐기고, 그날의 따끈따끈한 소식을 교환했으며, 노래하고 춤을 즐기며 음악을 짓기도 하였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과 만나서 교류할 수 있게 된 카흐베하네에는 정계의 고위직뿐 만이 아니라 종교계의 권위자도 드나들었으며, 특히 학자와 시인이 모여드는 ‘인식의 학교’로 점차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신분제에 얽매어 있던 유럽인들은 이국적인 나라의 이국적인 장소 카흐베하네를 바라보며 부러움과 더불어 묘한 감정이 일었다. 특히 상인들은 이런 정보를 가장 먼저 접한 이들이었으며, 신분제에 의해 돈은 많지만 낮은 계급으로 분류되었으니 그 들에게 커피란 새로운 이데아로 가는 지름길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커피는 유럽으로…


[그림3] 커피의 전파


16세기의 오스만튀르크는 안정된 정치상황을 구가하고 있었고, 이런 환경은 레반토의 상인들을 불러들이게 된다.

Levanto는 ‘해가 뜬다.’라는 의미로 지중해를 통과하는 동방무역을 했던 상인들- 동방의 신기한 물건을 지중해를 통해 유럽으로 실어나르고 있었던 상인-이다. 레반토 상인 중 영국의 모직물 무역을 위해 1600년 설립된 레반토 회사는 근대에 탄생하는 주식회사의 원형이 되기도 한다.

레반토 상인들은 커피와 카흐베하네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당시 불리던 ‘카와’라는 이름을 자기 나라의 문자에 맞춰 기록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들은 커피를 ‘이슬람의 와인’,’레반토의 리큐어’라고 표현하며 유럽으로 커피를 확산시키기에 이른다.


16세기에서 17세기 아랍이 독점하고, 재배방법도 알려지지 않았던 커피는 여러 경로로 유출되는데, 1616년 네덜란드 선장 아드리안 반 오메렌은 네덜란드로 커피묘목을 가져와 당시 식민지였던 향신료의 섬 자바에 농사를 시작해 후에는 온통 커피로 무성해졌다. 이것이 자바커피의 탄생으로, 바타비아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산지 직송되었다. 식민지 커피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외에도 17세기 초 인도에서 온 순례자 바바 부단(Baba Budan)이 발아가 가능한 커피 씨앗을 훔쳐 인도의 Mysore로 가져가기도 하였다.


이국적인 이슬람의 음료가 된 커피는 이렇게 유럽으로 유럽의 식민지 국가로 번져가고 있었고, 카흐베하네 문화도 이 흐름을 타고 유럽으로 점점 전파하게 된다.

16세기 오스만튀르크의 시대에는 아프리카에서 홍해를 건너온 커피는 쇄국적인 정책에도 불구하고 100년도 안돼서 전 세계를 향해 그 아로마를 퍼트릴 준비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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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에서 커피는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입니다. 참고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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