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오 Jun 03. 2024

“…”

Muji | 무인양품

규모가 큰 브랜드일수록 많은 인력을 동원해 많은 메시지를 쏟아낸다.

‘말이 많으면 실수가 잦은 법’. 브랜드의 이야기는 때로 오해를 부르고, 자신이 한 말의 앞뒤가 맞지 않아 혼란을 주기도 한다. 브랜드텔링에는 브랜드가 가진 신념이라는 기준이 필요하다. 브랜드의 신념은 브랜드가 존재하는 이유이자 핵심가치의 근원이다.

이름도 없고 표현도 자제하며 진짜 필요한 것만 취하는 브랜드가 있다.

무지 MUJI는 꼭 해야 하는 말이 필요할 때만 내용을 전달하는 브랜드다. 무지가 원하는 것은 화려한 브랜드 수식이 아니다. 그들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을 갈망한다. 무지는 브랜드 안에 의도적으로 빈 공간을 마련한다. 매장, 상품 등 모든 곳에 여백이 있고, 빈 공간은 사람들을 위한 자리가 된다. 여백을 만난 사람들은 오롯이 자신에 집중하여 스스로와 대화한다. 그리고 그곳에 자신의 삶을 채워간다.


미니멀리즘의 대화방식

1915년 러시아의 전시관 한편에 ‘검은 사각형’ 이란 제목의 유화가 전시됐다. 캔버스 가운데 검은색 사각형 하나만 덩그러니 그려져 있는 유화였다. 화가는 카지미르 말레비치 Kazimir Malevich. 당시 러시아는 니콜라이 2세의 무능함에 치를 떨면서 새로운 것을 갈구하고 구태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러시아의 전위파 예술가들은 작품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주제를 없애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무(無)’를 그렸다. 어쩌면 황족이나 귀족들이 향유하는 물질적인 것들을 부정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중심에 카지미르 말레비치와 그의 ‘검은 사각형’ 이란 작품이 있다.

이해하기 힘든 작품 앞에 선 사람들은 깊숙이 숨어있던 기억을 끄집어내어 작품과 함께 이야기하게 마련이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장소에 자신의 내면에 있는 의미가 부여된다. 작품은 이렇게 보는 사람과 암묵적 상호작용으로 이야기를 채워나간다.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은 미니멀리즘 Minimalism의 효시라 평가된다. 최소한을 지향하는 미니멀리즘 사조는 예술뿐 아니라 물건 등 모든 분야에 영향을 끼친다.

미니멀리즘 제품들은 최소한의 기능과 단순한 모습 등 기존 제품과 다른 모습으로 등장했다. 이전까지 제품들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기능과 내외적 디자인의 복잡성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꼭 필요한 기능만을 담아야 한다는 미니멀리즘 모토 아래 물건의 형태가 불필요하더라도 더 화려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없앴다. 1980년대 일본 유통시장에 나타난 미니멀리즘 열풍은 제조 공정을 간단하게 줄였고, 간결한 콘셉트의 제품을 대세로 만들었다. 미니멀리즘은 디자인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아니다. 오히려 간결함 속에 꼭 필요한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 더욱 깊은 생각과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꼭 필요한 것만을 담다.

무지는 이런 분위기에서 탄생했다. 무인양품無印良品 (むじるしりょうひん, 무지루시료힌). 무지는 무인양품의 발음에서 앞에 두 음절만 따서 소리 나는 대로 적어 영문으로 브랜드 이름을 만들었다. 무인의 무無는 없다는 의미다. 인印은 작품이나 물건 등에 찍는 도장이다. ‘무인’은 말 그대로 ‘브랜드가 없다’는 의미다.

무지는 일본 유통 산업의 선구자였던 기업가 쓰쓰미 세이지와 디자이너 타나카 잇코의 합심으로 1980년 가을 세이부 계열의 대형 슈퍼마켓 ‘세이유’의 PBPrivate Brand브랜드로 출발했다. 1970년대 말 일본은 유류 파동 등의 여파로 정부가 나서 국민에게 절약정신을 강조했고 국민 또한 위기의식으로 소비행태가 변화했다. 변화에 가장 빠르게 대처한 대형마트들은 자사의 PB 상품을 활성화시켰다. 세이유 역시 ‘높은 품질의 저렴한 상품’을 만드는 브랜드를 론칭하고자 했다. PB 상품의 경쟁환경에 뒤늦게 합류한 세이유는 고심했다. 다른 상품과 분명한 차별화가 필요한 시기였다. 경쟁 상품들이 앞다투어 가격 경쟁력에 대해 몰두하고 있었기에 세이유는 ‘품질’을 강조하며 ‘높은 품질의 저렴한 상품’을 만드는 브랜드를 기획했다. 1980년 세이유는 자신만의 기준에 맞는 40종 품목을 론칭한다. 일상생활 안에서 꼭 필요한 물건이면서 사용하기 쉬운 도구일 것, 불필요한 비용이 들지 않도록 패키지를 최소화할 것 등이 선정조건이다. 거기에 큐레이터이자 카피라이터였던 코이케 카즈코의 ‘이유가 있어서 싸다!’는 카피가 곁들여졌다.


지극히 합리적인 공정을 통해 생산된 상품은 매우 간결합니다.

이를테면 ‘텅 빈 그릇’과 같은 존재로, 단순하면서도 여백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함이 그 속에서 태어날 수 있습니다.

무지 웹사이트 ‘What is MUJI?’ 중에서


무지의 상품 중 깨진 건표고버섯이 있다. 표고버섯은 형태가 온전해야 시장에서 제값을 받을 수 있었지만, 무지는 역발상을 통해 생산, 유통 과정에서 깨진 표고버섯을 상품화했다. 조리할 때 표고버섯은 잘게 쪼개어야 하기 때문에 제 모양을 완전히 갖추지 않아도 충분히 상품성 있다는 판단이었다. 반값에 나온 깨진 건표고는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40종의 상품은 생활환경에 주목하는 소비자들의 지지를 얻어 1983년 아오야마에 단독 매장을 론칭하는 동력으로 자리매김한다.


디자인을 덜어낸 디자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하라 켄야 Hara Kenya는 무지의 ‘디자인 없음 No Design’에 대해 ‘무인 양품의 사상을 제대로 실현하려면 오히려 수준 높은 디자인이 필요하다.’라고 설명한다. 간소화를 위한 생략은 다른 경쟁사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다. 또한 저렴한 가격을 목표로 이루어지는 모든 행동은 값싼 노동력을 갖춘 나라에 제작을 의뢰하는 경쟁사와 차별성을 갖기 어렵다고 하라 켄야는 말한다. 그러므로 무지의 ‘디자인 없음’은 최적의 소재와 형태를 모색하고 합리적인 제조법을 통해 치장하지 않고 간결한 디자인으로 새로운 가치관이나 미의식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현명하면서도 낮은 가격대를 형성하는, 이른바 세계 어디에서도 유익한 가치가 되는 상품을 만드는 것이 무지의 가치관이다.

무지의 간소화 정신으로 디자인된 제품은 무지만의 독특한 시각적 정체성을 만들어 냈다. 표백하지 않은 아이보리 빛깔의 종이 소재 사용과 간결한 포장의 형태는 ‘신선한 느낌의 순수한 제품’이라는 당시에 독특한 시각적 심상을 심어주었다. 자연환경을 아끼는 공정 과정의 간소화는 생활 속 환경을 소비하는 일에 부담감을 느끼는 소비자에게 지지를 얻었다. 또한 표백하지 않은 빛깔의 독특한 시각적 심상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갈망했던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며 무지만의 시각적 상징이 되었다. 고객의 인지를 넘어서 지지를 얻어내는 행위는 정체성이 된다. ‘지지’라는 것은 동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표현에 대한 미의식은 미니멀리즘 트렌드를 따라 시끄럽지 않고 조용한 목소리가 됐다.



간소화라는 조용한 속삭임

‘브랜드의 이름’은 무형자산 가치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다. 브랜드가 이름을 정하고 브랜딩을 할 때, 브랜드와 소비자가 상호작용을 통해 ‘신뢰, 존경, 사랑’ 등의 보이지 않는 무형자산이 쌓이기 때문이다. 무지의 생각도 이와 유사하다. 웹사이트의 ‘무엇이 무지 인가 What is MUJI?’의 설명에서 무지는 ‘텅 빈 그릇’과 같은 존재이고 비어있는 그곳에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을 받아들이는 유연함을 간직한다고 설명한다. 무지는 자신들의 이야기로 채운 그릇을 일방적으로 주기보다는 애용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를 그릇에 채우고 싶어 한다.

무지는 그냥 단순한 디자인을 가진 상품이 아니라 브랜드 만의 독특한 스타일의 상품을 만든다. 무지는 많은 사람이 채울 수 있는 빈자리를 위해 ‘브랜드가 없다’라고 말한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함께 하는 사람만큼 무언가 있고,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말할 수 있는 침묵이 있다


비어 있어야
채우고 싶다.









이전 20화 “퍼트릴만한 가치가 있는 아이디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