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France | 혁명이 탄생한 카페
검은 물결이 유럽 대륙을 적시며 술에 취해있던 유럽인들도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벌써부터 커피가 스며 든 오스만튀르크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유럽 대륙을 향해 군침을 삼키고 유럽 침탈을 위한 두 번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첫 번째 빈 함락(1529)이 실패로 돌아간 후 150 여 년이 지난 후 다시 용기를 낸 터였다.
오스만튀르크의 술탄은 먼저 1669년 7월 프랑스 파리로 대사 한 명을 파견한다.
대사의 이름은 솔리만 아가(Süleyman Ağa).
주어진 임무는 오스만튀르크 군이 합스부르크의 본산 빈으로 향할 때 프랑스가 원군을 보내지 않도록 불가침 조약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이후 솔리만 아가가 파리에서 보낸 6개월은 새로운 파리 커피 상점의 원형이 잉태되는 기간이 된다.
루이 14세를 만나기 위해 궁에 들어가려 하는 솔리만 아가와 수행원들을 보초가 막아섰다. 수행원이 감히 왕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무례라는 말과 함께 선물 등 짐을 들고 갈 수 있는 최소 인원만 통과가 허락됐다. 대사는 최소 수행 인원과 궁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리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천상인지 지상인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화려함으로 가득했다. 벽은 그림이나 부조로 가득 차있었고 가구는 모두 은으로 만들어졌다. 화려함의 최고 으뜸은 신하들에게 둘러싸인 루이 14세. 그의 옷은 다이아몬드 등 보석으로 칠갑을 하고 살짝 움직이기만 해도 광채가 날아와 대사의 눈에 꽂혔다. 루이 14세의 옷은 당시 1,400만 리브르(약 100억 원) 였다고 하니 대사와의 만남에 무척 공을 들인 모양이다. 그를 둘러싼 신하들의 옷도 만만치 않았다. 이른바 프랑스의 로코코의 사치스러움과 화려함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루이 14세 앞에 선 솔리만 아가는 소박한 무명옷을 입고 대조를 이루며 초라한 듯 서 있었다. 그가 가져 온 커피 기구가 보이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솔리만 아가의 신하가 들고 온 황금색의 이브리크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이브리크에서 다이아몬드가 박힌 자르프에 옮겨지는 것은 검은 빛 음료였다. 그 향은 세상 어느 음료도 흉내 내지 못할 만큼 맛있었다. 루이 14세에게 전해진 자르프 외 나머지 음료는 중국에서 온 듯한 귀한 도자기에 담겼다. 하나하나가 당시로는 보기 드문 물건에 귀한 커피까지 대접하고 대사는 당당한 자세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사치스러움과 화려함의 극치 프랑스 로코코와 소박함 속에 숨어 있는 오스만튀르크의 신비주의의 말 없는 싸움이었다.
순식간에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이교도의 나라에 눌리고 싶지 않았던 루이 14세, 루이 14세의 의중을 알아내고 싶었던 솔리만 아가, 둘의 만남은 찜찜한 대화만 오갔을 뿐 서로 얻어지는 것은 없었다.
솔리만 아가는 그 날 이후 자신의 집으로 귀족들을 초대하기 시작한다. 궁정에 드나드는 귀족들로부터 왕의 속내를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초대한 귀족들이 방문하면 향기로운 목재로 꾸며진 방에 안내되었다. 벽은 반짝이는 타일로 장식되어 있고 바닥은 오스만튀르크의 값진 카펫이 깔려 있었다. 벽면 한쪽은 종유석으로 꾸며져 있었으며 아름다운 무늬를 가진 반구형 천정이 시선을 한쪽으로 사로 잡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머리 위는 온통 비단천으로 드리워져 있었고 바닥엔 그 귀하다는 몰약이 타며 후각을 사로잡았다. 오감이 마비된 듯 동방의 모습에 젖어들 때쯤 한쪽에서 신비로운 향긋함이 퍼지며 튀르크 의상을 입은 흑인 노예가 이브리크를 들고 나타난다. 그리고 손님 옆에 공손히 앉아 커피 접대를 한다.
대사는 손님들에게 마음씨 좋은 얼굴로 푹신한 쿠션을 가리키며 기대어 누우라 권한다. 의자 생활을 하던 귀족들에게 푹신한 쿠션에 반쯤 누운 자세는 세상을 다 갖은 듯한 만족감을 주었다. 사실 손님들에게 무엇보다 더 만족스러운 건 커피와 함께 곁들여지는 달콤한 설탕. 고소한 향과 입 전체를 흐르는 달콤한 맛은 오스만튀르크의 신비한 흥취를 더욱 북돋아 주었다.
화려한 이슬람 복장의 흑인 노예들이 달걀 모양의 작은 잔에 최상급 모카커피를 담아 무릎을 꿇고 대접을 한다. 향이 좋고 뜨겁고 강렬하다. 노예들은 커피잔을 금 접시와 은 접시에 올렸는데 그 아래로는 섬세한 금빛 무늬의 실크 냅킨을 깔았다. 온갖 좋은 것들로 화장한 귀부인들은 찻잔을 들고 점잖은 척 부채질을 하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고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커피를 마셨다.
아이작 디스레일리 Isaac D’Israeli | 문학의 호기심
신비와 커피에 취한 이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을 대사에게 털어놓았고 오스만튀르크가 합스부르크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도 프랑스는 움직이지 않을 거란 것을 알았다. 퍼즐이 맞춰지자 솔리만 아가는 초대를 기다리는 귀족들이 남아있음에도 그들을 뒤로 하고 술탄에게 보고하기 위해 귀국길에 올랐다.
대사가 고국으로 돌아간 뒤 파리는 한 동안 대사의 거처에서 행해졌던 신비로운 커피 접대에 대한 후일담이 귀족뿐 아니라 서민들에게도 퍼져 나가게 된다. 대사도 대사와 함께 마셨던 설탕 곁들인 커피도 모두에게 향긋한 기억과 달콤한 유혹으로 남게 된다.
2년 후인 1672년. 예상보다 빠르게 커피는 파리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퍼지기 시작한다.
생 제르망 시장 광장에 최초의 카페가 아르메니아인 파스칼(Pascal)에 의해 개점된다. 박람회장에 간이로 만들어진 판매대라서 정식 카페는 아니었지만 콘스탄티노플의 카흐베 하네를 모방해서 만들어졌다.
파스칼은 중간 상인을 배제하고 자신이 직접 커피 무역상에게 지불하고 원두를 구매했기 때문에 저렴한 가격에 커피를 제공할 수 있었고 호기심과 갈증으로 목말라하던 소시민들 까지도 몰려들게 되었다.
용기를 얻은 파스칼은 박람회가 끝나고 케 드 레콜(Quay de l’Ecole) 거리에 정식으로 가게를 오픈했지만 곧 파산하기에 이른다. 저렴한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커피에 층층나무 열매와 도토리를 섞어 맛이 없어진 것과 저렴한 가격정책으로 인해 터키 대사가 남겼던 귀족적인 신비감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파스칼의 카페는 허무하게 사라졌지만 거리에서 커피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1690년 크레타섬 출신 칸디아(Condiot)는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바구니를 배 쪽으로 고정하고는 커피 주전자를 들고 행상을 나서서 ‘커피요’ 하고 소리치며 다녔고 그 소리를 듣고 컵을 들고 나온 손님에게 커피를 따라주면서 장사를 했다.
하지만 파리에서 카페가 성공하기 위해선 커피 외에 다른 것들이 필요했다.
이런 사실을 직감한 사람은 프로코피오 콜델리(Procopio de Coltelli).
그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공간과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서 교류할 수 있는 넓은 장소가 필요함을 알고 팔레 루아얄(Palais Royal)에 있던 넓은 목욕탕을 구매해 카페로 개조를 하고 1702년 오픈한다. 테아트르 프랑세즈(Le Théâtre-Française) 맞은 편에 오픈한 그곳은 카페 프로코프(Cafe Procope)로 최초의 순수 유럽식 카페다. 이 카페로부터 18세기 모든 카페가 유래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페 프로코프의 단골 중엔 미국의 벤자민 플랭클린도 있었다. 벤자민 플랭클린은 1776년 주불대사로 파견되어 공수동맹을 맺는 등 미국 독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1775~1783)을 지원한 과도한 군사비로 재정난에 빠지고 이에 불만을 품은 시민계급은 미국 독립전쟁을 보며 자유를 각성한다.
카페 프로코프는 벤자민 플랭클린의 미국 독립을 위한 행보를 응원함과 동시에 프랑스 혁명의 근원지 팔레 루아얄 카페의 유래가 되었다는 묘한 연결점이 생기는 곳이다. 1790년 벤자민 플랭클린이 죽자 카페 프로코프는 조기를 내걸기도 했다 한다.
18세기 카페 문화가 깃든 팔레 루아얄 거리는 전에 없이 생동감이 넘쳐났다. 사람들이 몰려나와 커피 행상에게 커피를 사마시면서 이야기 꽃을 피웠고 여유가 되는 사람들은 카페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눴다. 카페 안은 영국과 달리 여성들도 출입했기에 카페 안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평등하게 모여 얘기를 나누는 장소가 된다. 1761년 이후 20년간 폭등한 빵값과 1787년 이후 거듭된 흉작으로 프랑스 전체 인구 85%를 차지하는 농민은 강한 불만을 갖는다.
국민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제3신분(도시민, 농촌인) 시민들은 카페에서 뉴스를 듣고 이야기와 토론을 나누고 비판하는 것이 일상이 된다. 유래 없는 카페 호황에 거리엔 새로운 카페가 하나 둘 씩 퍼지고 있었고 카페마다 다른 성향의 모임이 생긴다.
카페 데 아뵈글(Café des Aveugles)은 귀머거리 가수가 리더인 눈 먼(Aveugle) 악단이 나와 무능한 왕정을 비꼬는 패러디를 감행하고, 카페 베르(Café vert)는 귀족들을 비난하는 뜻으로 원숭이를 훈련시켜 손님의 목으로 달려들도록 했다 한다.
급기야 1789년 7월 12일 카미유 데물렝(Camille Desmouling)은 팔레 루아얄에 있는 카페 드 포아(Café du Foy) 탁자 위로 뛰어올라가 군중을 향해 ‘귀족에 대항해서 무기를 잡아라!’라고 외친다. 7월 14일 아침, 데뮬렝의 외침은 현실화되어 파리 시민은 혁명에 필요한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이 사건은 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군주제를 뒤엎는 시작이 되었다.
여러분의 댓글은 커다란 힘이 됩니다. ^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