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Korea | 슬픈 커피 역사의 시작
“펑 퍼벙 펑”
“쾅 콰광”
강화도 초지진(草芝鎭) 포대 포격이 시작됐다.
멀리서 슬금슬금 접근하던 왜선(倭船)이 필요 이상으로 선을 넘고 있었다. 식수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군인들이 나눠탄 보트는 연안까지 넘어들어와 뭔가 엿보는 듯 하다. 몇번이고 경고했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
더 이상 허용해선 안된다 생각한 초지진에선 경고 포격을 한 것이다. 포격이 시작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영국으로부터 도입한 최신식 포함 운요호(雲揚號)에서는 불꽃이 작렬했고 초지진은 박살이 났다. 1875년 9월 20일 해전에서 일본은 단 2명의 경상자만을 냈고 조선은 35명의 전사자와 포로 16명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더 가관이었던 건 다음 해에 일본은 모든 잘못을 조선으로 돌리고 개항을 강요했다. 1876년 2월 일본은 대사와 군함 5척을 강화도에 보내 조약 체결을 강요하고 받아 낸다. 미국의 동인도 함대가 흑선을 몰고와 포를 쏘고 겁박하여 일본에 개항을 요구해 미일화친조약을 맺은 것과 너무도 흡사한 모습이었다. 미일화친조약을 계기로 일본도 문호를 개방했고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조선도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게 된다.
일본의 적극적인 행동에 당황한 것은 청나라였다. 청나라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은 조선내 일본을 견제하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에 구미(歐美:유럽과 미국) 여러 나라와의 수호 통상을 추천하고 나섰다. 1882년 5월 22일 청나라 이홍장의 주선으로 한국은 미국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은 조선이 구미 국가와 맺은 최초의 수호통상 조약으로 1882년을 기점으로 조선은 구미 여러나라들에게 문호(門戶)를 개방한다.
그로 부터 1년 후 먼저 찾아와 준 미국 정부의 부름에 응답하는 사절단이란 의미의 보빙사(報聘使)를 조선 최초로 미국에 파견한다. 미국에서 보빙사를 인도해 준 사람은 퍼시벌 로런스 로웰(Percival Lawrence Lowell).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인 그는 극동지역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으로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중 주일미국공사의 요청으로 조선의 미국 수호통상사절단 보빙사를 보좌하며 국서 번역과 통역관 역할을 수행한다. 그 공로로 고종은 그를 국빈으로 초대하고 그는 1883년 12월 20일 조선으로 들어온다.
그가 체류한 3개월간의 기록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이라는 책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리고 이 책엔 조선의 커피 음용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있다.
1884년 1월 조선의 관리에게 한강변 별장으로 초대를 받아 가서 적은 그의 기록은 커피가 조선에서 이미 음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퍼시벌 로렌스 로월 Percival Lawrence Lowell
조선에서 커피가 음용되기 시작한 건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어쩌면 파리외방 전교회가 한국에 파견한 신부들에 의해 들어와서 신도들이 암암리에 음용했을 수도 있고 중국으로 부터 들어와{서유견문) 귀족들에게 환심을 사기위해 선물로 전해졌을 수도 있지만 기록은 없다. 다만 일반 민가에선 커피의 색이 검고 한약과 같아 양탕(洋湯)국 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글을 아는 선비들에겐 가배차(珂?茶), 가비차(加比茶) 등의 이름으로 불리웠다.
고요함을 가르고 말발굽 소리가 도성을 깨웠다. 말에서 내리는 사람의 모습은 이제까지 보던 사람과 달랐다. 코가 오똑하고 눈이 부리부리 하지만 깊숙하게 들어간 강렬한 모습을 사람들은 놀라워 했다.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 한국이름으로는 목인덕(穆麟德)은 1882년 12월 26일 고종을 알현한 날 신설된 외교부서에 참판으로 임명된다. 고종은 그에게 조선의 관복을 하사하여 백성들이 그를 외국인처럼 생각지 않도록 배려한다. 그리고 그는 목참판이라 불리며 항구의 세수를 관리하는 부서에 재직한다. 그가 행했던 또 하나의 임무는 외국에서 부임해오는 관료들을 대접하는 일이었다. 1885년 인천에 있는 영국 영사관 부영사로 부임하는 윌리엄 리차드 칼스(William Richard Carles)를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대접하게 되었다. 부영사 칼스와 목참판은 그날 함께 커피를 나누며 향수를 달랬고, 그들의 만남과 커피에 대한 기억은 칼스의 책 ‘한국에서의 삶’(Life in Corea)에서 사치스러운 향내와 함께 깊게 베어있다.
한국에서의 삶Life in Corea, 윌리엄 리차드 칼스 William Richard Carles.
문호 개방으로 갑작스럽게 변화하는 나라를 당황한 것은 조선의 백성들이었다.
불과 십수년 전 만 해도 프랑스에서 온 신부들을 모두 참살하지 않았던가.(1866) 하지만 지금은 여기저기서 그런 사람들이 활보하고 있으니 그 모습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을까.
아마도 부영사 칼스는 인천 제물포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내내 당황한 조선 사람들의 살펴보는 눈초리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눈엔 아직도 경계의 눈빛이 가시지 않았을테니 한양으로 오는 길이 그리 편안하지 않았을 터였다.
비록 국적은 달랐지만 독일인 묄렌도르프와의 만남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그가 내준 커피 한잔은 그 어느 때 보다 그를 행복하게 했음이 틀림없다.
경복궁의 영추문을 빠져나온 궁녀들이 사용하는 교자(가마)가 비탈진 좁은 길을 따라 위태위태한 느낌마저 드는 속도로 빠르게 어딘가로 향했다. 가마가 도착한 곳은 정동의 언덕에 있는 아라사 공사관(俄羅斯 公使館) 즉 러시아 공사관이다. 가마의 문이 열리면서 나온 분은 고종(高宗)과 세자였다. (1896년 2월 11일)
V.P 카르네프 외, [내가 본 조선, 조선인] (가야넷, 2003) p.99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 의해 시해되고 아버지 흥선대원군 마저 없는 궁궐에서 시작될 일본의 꼭두각시 역할은 고종와 조선에 있어서는 안될 일이 었다.
조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명성황후가 마지막으로 선택했던 러시아를 끌어들여야 한다 생각한 그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강수를 둔 것이다.
왕을 마중나온 사람은 러시아 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Karl Ivanovich Weber)와 독일계 러시아인 안토니트 존탁(Antoniette Sontag) 이었다. 한국이름으로는 손탁(孫澤). 손탁은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도운 인물로 공사 베베르의 추천으로 경복궁의 양식 조리사로 임명되었던 여성이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손탁 여사는 여전히 고종의 옆에서 왕의 어식을 책임지고 관리했다.
고종이 내실에 앉자 손탁여사는 커피를 내왔다.
커피는 멀리서도 그 향을 느낄 수 있었다. 커피향이 점점 가까워지자 쪼그라 들었던 몸과 마음이 사르르 녹아 내렸다. 한 모금 마시면 세상의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듯한 편안함을 느낀다.
하지만 고종이 그리도 편안히 마셨던 아관에서의 손탁의 커피는 어쩌면 조선의 독배였을 지도 모른다.
아관에서 커피와 함께 숙고를 마치고 나온 후 1897년 10월 고종은 환구단에서 제사를 지낸 뒤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세계사에서 유래없는 505년의 역사를 가진 왕조 조선은 사라지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이 건국된 것이다. 약칭은 대한(大韓), 한국(韓國). 후에 대한민국(大韓民國) 국호의 근간이 된 이름이다.
고종은 커피를 즐겨마시는 것은 물론 궁중의 관료들에게 하사품으로 내리기도 했다. 대한제국의 커피는 왕실에서 관료로, 양반으로 퍼지며 점차 대중화가 되었다. 개항하면서 들어 온 외세의 음료 커피가 하늘같은 황제의 어선(御膳)에 오르는 것을 본 관료들은 하사품으로 내려진 커피를 음미하며 군주의 근대화에 대한 의지를 느꼈을 것임은 자명하다. 그러니 아마도 그들에게 커피 한잔의 시간은 이 나라의 근대화를 고민하는 시간이지 않았겠는가.
고종순종실록, 광무2년(1898) 9월 11일.
하사품으로 내려진 기록이 있었던 1898년 그 다음날 9월 12일 슬픈 기록이 적힌다.
그 날도 고종은 의례 세자와 함께 커피를 나누었다. 커피의 향은 언제나 그렇듯 멀리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커피의 향은 왠지 이상했다. 새로 바뀐 커피인가하고 고종은 생각했다. 그래서 살짝 맛을 본 커피의 맛은 예의 커피 맛이 아니었기에 바로 뱉어냈다. 세자는 별다른 생각없이 커피 한모금을 마셔버렸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통역을 하며 고종에게 총애를 받았던 김홍륙은 이후 러시아와의 교역에 거액을 착복한 사실이 밝혀져 유배를 가게 되자 고종이 즐겨마시던 커피 찻주전자에 한 냥의 아편을 넣었다. 황제가 즐겨 마시고 즐거워했던 커피를 독배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세자는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정신을 잃엇고 고종은 여독으로 치아 18개를 잃는다.
독립신문 1898년 9월 13일
궁중의 법도가 허물어지고 궁녀는 20여 명으로 줄어들어 황제에게 변변치 못한 어선을 올릴 수 밖에 없었던 황실.
부실한 대한제국 황실에 커피 찻 주전자는 돈에 혹한 이들에 의해 독배로 변해버렸고 조선에 독배를 내렸던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에게 커피는 독배가 되어 버렸다.
커피 역사상 유래없는 슬픈 이야기로 한국의 커피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