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Japan | 우연한 만남, 필연적 시작
1497년 리스본에서 바스코 다가마(Vasco da Gama)의 범선 3척이 출항한다. 바스코 다가마 출항을 시작으로 포루투갈은 대항해시대(Era dos Descobrimentos, Age of Discovery)의 막을 열고 15세기, 16세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땅을 찾아 개척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포루투갈의 탐험가들은 발빠르게 돌아다녔고 그들의 열정과 목숨을 건 항해는 유럽의 다른 강국에 비해 작은 나라 포루투갈에 부를 가져다 주었다.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 대륙에 포루투갈은 흔적을 남겼고 아시아의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 규슈 남단 ‘다네가시마(種子島 종자도)’ 에 1543년 어느 날 낯설고 큰 포루투갈 선박 하나가 도착한다. 도착(倒着)이라기 보다 풍랑에 길을 잘못 든 표착(漂着)이었다. 포루투갈인 들은 그렇게 우연히 일본과 만났다.
1600년에는 또 다른 배 낯선 선박 하나가 ‘분고노구니(豊後國, 풍후국, 현재 오이타현)’ 에 표착했다. 포루투갈과 경쟁하며 동인도 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 Dutch East India Company)를 만들어 전 세계를 누빈 네덜란드의 선박이었다.
표착으로 우연히 일본과 만난 두 나라의 운명은 1603년 에도시대(江戶時代 강호시대)의 시작과 함께 엇갈리기 시작한다.
포루투갈의 표착으로 일본에 들어 온 것은 이국의 진기한 물건뿐 만이 아니라 선교활동도 함께 였다. 기독교 선교 활동은 포르투갈 대항해의 목표이자 정체성이었기 때문이다.
에도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덕천 가강)는 무역 이익을 중시하긴 했지만 새롭게 정비된 막부 체계에 이국의 종교에 의한 기독교인의 증가와 단결은 방해요소였다. 하지만 이와 달리 네덜란드는 신교국이면서 상공업을 중시했기 때문에 선교활동을 하지 않고도 교역을 하겠다는 입장을 정리했고 이 때 부터 이에야스는 선교활동을 해야만 하는 국가와의 무역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쇄국과 무역을 모두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도쿠가와 막부는 1613년 이국 신앙의 금지를 명문화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16년에 사망한 이 후 금교령은 계속 되었다.
금교령에도 불구하고 포루투갈과의 교역은 바로 끊을 수 없었던지 1634년 막부는 땅을 내주지 않고 바다를 내주었다. 나가사키(長崎市, 장기시)의 마치슈(町衆, 정중, 부유 상공업자)들에게 명령하여 바다에 만든 인공섬 데지마(出島 출도)를 내준 것이다.
이 후에도 포루투갈은 대항해의 정체성을 이어 선교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결국 1639년 포루투갈인 모두가 데지마에서 추방되고 섬은 비워졌다.
2년 후 외국인에게 유일하게 허한 일본의 땅 데지마 섬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상관(商館)이 들어서고 히라도(平戶島 평호도)의 네덜란드인이 이주해 온다. 금교령을 포함한 쇄국정책에 유연하게 대처했기 때문이었다.
바다에 지어진 인공섬이자 일본과 서양의 유일한 소통창구인 데지마에 드나들 수 있었던 일본인은 관리와 통역가들로 한정되었고 일본 커피 역사에 최초로 커피를 마신 이들이라 화란상관일기(和蘭商館日記)에 기록되어 있다.
그닥 그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던지 커피는 널리 퍼지지는 않았다.
에도시대 유명한 풍속 소설 작가 오타 난보의 게이호유우테츠(瓊浦又綴 경포우철)에서, 1804.
양아버지를 따라 에도에 간 열일곱 우다가와 요안(宇田川榕菴 우전천용암)은 쇼군(将軍)을 배알하기 위해 온 데지마 화란(和蘭) 상관의 상관장을 만났다. 이국에서 온 상관장과 그의 옷, 그리고 앞에 놓인 잔 등 눈에 들어 온 모든 것은 날카롭고 섬세한 통찰로 이어졌다. 그 중에 후각을 자극하는 하얀 잔에 검은 액체는 무엇인가? 분명 예사롭지 않은 향기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향기를 가진 그것은 또 어떻게 미각을 자극할 것인가?
어렸을 때 부터 관찰한 모든 것은 통찰로 이어진 그였다.
에자와 요주(江沢養樹)의 장남 요안의 영민함을 알아본 건 요주의 스승인 우다가와 신사이(宇田川榛斎) 였다. 요주의 아들 요안을 우다가와 가문에 입적시키고 학자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신사이는 생각했다. 신사이 역시 우다가와 가문에 입적된 양자였다. 할일은 많은 데 세월은 짧았다. 그러던 차에 자신과 가문의 업적을 이을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요안을 본 것이다. 제자인 요주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 하여 14살의 요안을 입적시킨다.(1811)
양아버지와 상관장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호기심을 잔뜩 자극하는 검은 액체가 든 하얀잔을 들어 입술에 적셔보았다. 향기와 어울리지 않는 쓴 맛이 톡 쏘듯 다가 왔다. 다시 한 번 입술에 가져가 이번엔 입안에 넣어보았다. 혀가 쓴 맛에 길들여질 때 쯤 커피의 담백함이 느껴졌다. 그 담백함은 액체에 깃든 기름기도 한 몫 하는 것 같았다. 따뜻함 때문인가? 덩치큰 상장관 앞에서 가졌던 긴장감이 풀어지는 듯 했다. 오히려 편안해졌다. 용기가 났다.
커피라는 음료에 자극받은 요안은 열아홉 나이(1816)에 최초의 커피 논문 가비을설(哥非乙説)을 썼다. 논문에는 커피의 산지와 효용 등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었고 그의 가타카나カタカナ 감각으로 가베(珈琲)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珈(가)는 여성의 머리를 치장하는 구슬 장식, 琲(배)는 구슬 장식을 엮는 끈을 나타내는 말을 합해 발음이 ‘코히’이다.
커피 체리(열매)가 새빨갛게 여문 커피 나무의 모습과 일본 전통 여성의 머리 장식이 닮은 데서 만들었다 한다.
1833년 일본 최초로 서양식물학을 소개한 식학계원(植学啓原)을 저술한 학자 답게 날카로운 관찰이 섬세한 표현으로 이어진 단어가 탄생한 것이다.
가베(珈琲)가 대중에게 퍼지기 시작한 것은 1853년 구리하마(久里浜 구리병)에 나타난 2척의 검은 증기선(흑선 내항(黒船来航 구로후네 라이코)으로 부터였다. 미국의 동인도 함대 사령관 매튜 C.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는 대포로 에도를 포격하겠다 엄포를 놓으며 개항을 요구했고, 1854년 미일화친조약(日米和親条約, Convention of Kanagawa)까지 맺는다.
이 사건이후 하코다테(函館 함관)와 시모다(下田 하전) 항을 외국인에게 개항했다.
개항은 개혁으로 흘러가 막부가 해체되고 왕정이 복고되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명치유신)으로 이어졌다.
개항된 항구를 통해 들어오는 외국인과 교류가 있던 자국민들을 시작으로 가베는 일본열도를 깨우기 시작했다.
상점에 샘플로 들어 온 가베를 맛보고 깜짝 놀랐다. 근검절약을 신념처럼 믿고 살아 동전 하나도 허투루 쓴 적이 없었던 그였기에 처음으로 가베를 마셨을 때 이제까지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아로마에 취해버리고 말았다. 커피의 아로마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렸다.
무역항 고베에서 서양음식재료를 판매하는 상점을 운영하던 우에시마 타다오(上島忠雄)는 가베를 처음으로 맛본 날부터 새로운 꿈을 꾸며 1933년 가베를 만드는 원두 로스팅 사업을 시작한다. 해외에서 생두를 들여와 원두를 만들어 전국에 팔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그의 사업에 제동을 건다.
1937년 일본의 중국 대륙 침략으로 발발된 중일 전쟁을 치르던 정부는 필요한 일상품 외에 모든 것을 사치품으로 규정하고 전쟁에 집중한다. 커피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생두 수입은 전면 중단된다.
전쟁이 끝나 도시를 재건하고 빠르게 경제 성장을 해야 했던 일본은 무역을 재개했고 1950년 생두에 대한 수입도 재개되었다. 우에시마는 콜롬비아에서 들여 온 생두를 로스팅해서 파는 것을 시작으로 원두 사업을 재가동했다. 가베 사업에 자신감이 생긴 우에시마는 1951년 우에시마 커피 주식회사(Ueshima Coffee Co., Ltd. UCC)을 설립한다.
그는 원두를 찾는 상점이나 회사,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구두 바닥이 다 닳도록 기차로 구석구석까지 돌아다녔다.
하루는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기차역 상점에서 커피우유를 사서 마시고 있을 때 였다. 병에 든 커피우유를 다 마시기도 전에 기차가 출발한다는 기적소리가 났고 그는 상점에 커피우유를 남긴 채로 병을 반환해야 했다. 전후 일본은 모든 물자를 절약하는 정책을 전개했고 모든 유리병 음료는 유리병을 꼭 반환해야 한다는 제도때문이었다.
평소 물건을 아껴쓰던 그는 이런 일이 무척 낭비라고 생각했다. 병을 반환해야 하기때문에 남겨진 음식 채로 병을 반환하는 것은 낭비를 막기 위한 낭비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세계의 역사는 불편함과의 사투 끝에 얻어진 결과물이 아니던가. 우에시마의 낭비에 대한 불편한 생각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
병을 반환해야 한다면 반환없는 것에 담아서 음료를 파는 것은 어떨까?
콜라와 쥬스를 담는 캔에 커피를 담으면…
상식적인 생각이 일본 가베 음료와 세계 가베 음료를 바꾸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 때부터 열심히 개발한 캔에 담긴 UCC 의 캔 커피는 1969년 4월 탄생했고 세계 최초의 캔 커피가 된다.
세계 최초의 캔커피 디자인은 그 옛날 요안이 커피 나무의 모습을 글자에 묘사한 것 처럼 커피 채리의 빨간색과 꽃의 흰색 그리고 로스팅한 원두의 갈색 등 3색을 캔에 아로 새기며 만들어 졌다.
표착에 의해 만난 이국의 사람들과 그들이 가지고 온 커피의 아로마가 두 사람과 우연히 만나 남긴 첫 경험은 통찰로 이어져 일본 고유의 가베와 가베 문화를 만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