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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커피여정

물을 섞은 커피, 물에 녹인 커피

미국 America | 개척과 투쟁의 역사와 함께 한 커피

by 비오


물을 섞은 커피, 물에 녹인 커피 내용 요약


보석과 향신료를 찾아 스페인의 팔로스(Palos) 항을 떠나 동쪽 방향으로 향하던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는 33일이 지난 1492년 10월 12일 지도에는 없는 육지 하나를 발견한다. 콜럼버스는 이 곳을 인도(India)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곳은 그가 바라던 보석도 향신료도 없이 미개인과 그들이 재배하는 옥수수 만이 가득한 섬이었다. 콜럼버스의 착각으로 인해 이 섬(산살바도르섬 San Salvador island, 구세주의 섬)과 그 지역은 서인도 제도(Indias Occidentales)라 불리게 되었고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인디언(Indian)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림1] 12 October 1492 – Landing of Columbus, painting by John Vanderlyn


콜럼버스나 배후의 스페인에게 그저 미개인이 사는 쓸모없는 곳으로 여겨졌던 이 땅 북미대륙은 100여년 이상 어느 국가의 소유도 아닌 채 남아있게 된다.

17세기 유럽의 강국들은 새로운 기회를 위해 식민지를 찾아 바다로 향했고 누군가 발견하지 않은 육지라면 세례를 주며 이름을 짓고 정착민을 이주시켜 자국화시키기 바빴다. 이 시기 무주공산으로 남아있던 북미대륙에도 유럽인들이 하나 둘씩 날아들었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선단이 대서양에 접한 연안 지역에 상륙해 식민지화를 시작한 것이다.

그 중 영국의 식민 정책은 국가 주도가 아닌 민간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왕실은 민간차원의 식민정책이 골치 아픈 국내 문제를 해결하기에 은근히 반기고 있었다. 1559년 로마 교회에서 영국 성공회(Anglicanism)가 분리되면서 영국의 청교도(Puritan)와 대립이 심화되면서 혼란함이 가중되고 있었기 때문에 각 종교 단체도 종교적 독립을 위해 민간 선단에 합류했다. 종교적으로 시끄러운 문제가 이민으로 해결되고 민간인들이 식민지 개척을 하면 경제적으로도 이득이 있을 것이란 계산때문이었다.

영국 민간 선단은 합자형태로 신대륙 개발에 투자를 했고 북미대륙 개척의 시작은 1607년 4월 버지니아 회사(the Virginia Company)가 현재 버지니아 주에 위치한 곳에 거류지를 세우고 제임스타운(Jamestown)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북미대륙에 처음으로 선보인 커피

정말 척박한 곳이었다. 험한 날씨와 정글 습지에 식수는 부족했다. 거류지 주변은 임시 거처를 만드는 것 조차 어려웠다. 1607년 4월에 도착해 여름이 지나갈 때까지 임시 거처를 그대로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들이 가지고 온 식량조차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버지니아 회사의 일원이 되어 제임스타운의 지휘를 맡았지만 존 스미스(John Smith)에겐 앞 날이 더 걱정이었다. 이 곳 황무지를 빨리 개간하여 이주해 온 정착민들이 일을 하고 생산을 해야 이 곳을 삶의 터전으로 생각할 것이고 그래야 더 많은 사람들이 본국에서 이 곳으로 이주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는 주변일대를 그릴 지도 꾸러미를 들고 13살 어린 몸종을 데리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가 가지고 간 꾸러미엔 커피도 함께 들어있었다. 존 스미스가 커피를 알게된 것은 오스만 투르크에 가서 기사로 활동할 때였다. 그 후로 그는 커피를 애용하게 되었고 어딜 가든 커피를 가지고 다녔다. 아마도 그는 현재의 버지니아 일대를 다니며 만든 북미대륙 최초의 지도를 그리며 커피라는 벗과 함께 했을 것이다.

그가 가져 온 커피가 북미 전체에 퍼지게 된 시작인지에 관한 기록은 없지만 그의 커피가 북미 대륙에 들어 온 최초의 커피인 것은 그의 일기에 남아있다.


[그림 2] 존 스미스와 그가 그린 지도


물을 섞어 마시는 커피

1620년 11월 21일 영국 청교도 102명을 태운 메이플라워(Mayflowe호가 영국을 출발한지 66일 만에 프로빈스 타운 항구에 닻을 내렸다. 북미대륙의 정체성을 이끌어 줄 메이플라워 이민선단을 시작으로 영국인은 대서양 연안에 13개 식민지역을 건설한다.

뉴잉글랜드에는 청교도가 집결했고 펜실베니아는 퀘이커 교도가 메릴랜드에는 카톨릭 교도가 모이는 등 자국의 영국성공회 압박에서 자유로워지고자 이주한 사람들이 식민주민이었다. 자유에 대한 의지로 척박한 황무지를 개척했고 아무 것도 없던 북미대륙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본국으로부터 경제적 자립의 힘도 생겼다.

영국은 프랑스와의 7년 전쟁으로 전비자금을 위해 식민지 주민이 필요로 하는 증명서와 허가증에 붙이는 인지에 세금을 부과하는 인지세법(Stamp Act)을 1765년 3월 22일부터 시행했다.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진 신대륙 개척에 나서 정부의 도움이라고는 다 만들어놓은 식민지에 허가증을 내주는 것이 전부임에도 본국에 세금을 내라는 것에 대한 식민주민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1년 뒤 인지세법이 폐지되었지만 그렇다고 영국 본국에 자금의 필요성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영국은 인도에서 아편 농사를 지었는데 중국에 아편을 판매하고 차를 싼 값에 들여오는 무역을 하고 있었다. 이 싼 값으로 들여오는 차를 식민지에 독점하고 세금을 부과하는 차법(Tea Act)을 1773년 5월 10일 시행한다. 속내를 알고 있던 식민주민들은 분노했다.


[그림 3] 13개 식민지. 1775년


분노한 몇몇 주민은 차를 싩고 보스턴 항에 정박해있는 영국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 선박에 인디언 복장을 하고 들어가 홍차 상자들을 바다에 버린다. 이 사건이 바로 미국의 독립 선언의 불씨가 된 1773년 12월 6일에 일어난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이다.


[그림4] 인시세범의 인지와 보스턴 차 사건


가뜩이나 힘든 식민지 생활에 유일한 낙이 일을 마치고 들어와 한 잔의 차를 마시는 시간이었다. 그 차에 본국에서 보이는 검은 뜻이 숨겨져 있음을 안 식민 주민들은 차 마시는 시간조차 화가 솟구쳤다. 식민주민들은 분노가 담긴 차 대신 커피를 선택했다. 보란 듯이 영국인들이 차 마시는 습관에 항거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마시는 음료는 달라졌어도 마시는 방법은 습관적으로 남아 커피를 차 마시듯 연하게 해서 마셨다. 그리고, 물을 섞어 계속해서 마셨다. 변변한 도구없이 만들어진 커피는 맛있기보다는 강렬하고 쓴 맛에 텁텁한 맛이었기에 물을 더 많이 넣어서 마셨던 것이다.

그들이 마신 커피 한 잔엔 수 많은 생각과 삶의 흔적들이 담겨있었다. 식민 주민에게 한 잔의 커피는 속박에 대한 저항이요 자유에 대한 의지였던 것이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

Patrick Henry, 1775년 4월23일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 연설 중에서


이 때부터 였을까?

13개 식민지 대표가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프랑스의 원조를 받아 미국의 독립을 이끌어 내 건국한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의 사람들이 마시는 커피는 아주 연한 커피였다. 이런 습관들을 보고 미국인들이 마시는 커피라 하여 Caffe Americano 라고 불렀고 그것이 지금의 아메리카노(Americano)이다.

물을 탄 커피는 좀 연하기는 했지만 설탕은 꿈도 못 꾸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설탕과도 같은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커피의 강렬함을 잦아들게 하고 커피 본연의 향기를 도드라지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었다.

일부 유럽인들이 뿌리가 깊지 않은 그들을 비아냥 거리듯 말했던 아메리카노는 잊지 못할 눈물과 입술을 질끈 물며 다짐했던 그들의 자유에 대한 의지를 상징한 커피였고 그들의 의지는 커피와 함께 퍼져 유럽 각국에 자유와 평등을 위한 혁명의 장으로 만들어 갔다.


물에 녹여 마시는 커피

커피에 물을 섞어 마신 습관은 또 하나의 진기한 커피를 만들어 낸다.

1783년 9월 3일 미합중국이 탄생한 이 후 이 곳에는 크고 작은 전란들이 발생한다. 인디언과의 전쟁, 내부반란의 진압 그리고 외부 강국으로 부터의 보호를 위해 신생국가에 군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리고, 군대의 강성한 힘이 빨리 만들어져야 했는지 1800년대 부터 미 육군 군부부 ‘군용커피’라는 자료에서 ‘군사적으로 유용한 커피’를 개발했다는 기록이 있다.

1,500 ~ 3,000 년 전 에티오피아에서 최초로 커피라는 식물을 전투에 이용한 오모로 부족들은 커피를 잘게 부셔 가루를 낸 다음 기름과 섞어 동글동글 뭉쳐 골프공만한 크기로 만들어 전투 전에 꺼내어 깨어물고 신속하게 움직여야 할 때 기분을 들뜨게 하고 잔인하고 맹렬한 행동을 이끌어 내는 효과를 보았다.

오모로 부족처럼 그들도 군에서 사용할 커피를 개발한 모양이었다. ‘군용커피’를 개발할 때 염두에 두었던 것은 가볍고, 장기보관이 가능하며, 먹기에 간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1853년 개발해 낸 것은 ‘cakes’라 불린 최초의 인스턴트 커피였고 1862년 이를 군용커피로 승인한다. ‘cakes’는 커피를 농축해서 만든 고체 덩어리 형태였고 필요할 때 찬물에 녹여도 마시고 물이 없어도 씹어서 먹도록 만들어졌다. 마치 그 옛날의 오모로 족이 씹었던 것 처럼…



[그림 5] 커피와 동물성지방을 섞어 만든 커피볼


최초로 대중화 한 인스턴트 커피도 군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조지 워싱턴(George Constant Louis Washington)이란 벨기에인은 과테말라에서 살고 있었다. 그 곳에서 은으로 만든 커피 포트로 커피가 만들어진 후 수증기가 뿜어진 자리에 커피 결정체가 생기는 것을 보고 착안하여 물에 녹는 커피 가루 만드는 방법을 1906년에 만들게 된다. 이후 미국의 뉴욕으로 이민 온 그는 G. Washington 이란 회사를 만들어 G. Washington’s Refined Coffee라는 제품을 출시한다.

이 커피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건 생산된 제품 전량이 미 육군에 납품된 1618년 부터 였다.


Washington_Coffee_New_York_Tribune.png [그림 6] 조지워싱턴 인스턴트 커피와 뉴욕 튜리뷴지 광고(New York Tribune, June 22, 1919.)


어느 병사의 기록에서 보면 작은 석유 히터에 불을 켜서 조지 워싱턴 커피를 타 마시는 건 전쟁의 어려움 속에서도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라 적혀있다.


I am very happy despite the rats, the rain, the mud, the draughts [sic], the roar of the cannon and the scream of shells. It takes only a minute to light my little oil heater and make some George Washington Coffee ... Every night I offer up a special petition to the health and well-being of Mr. Washington.

— American soldier, 1918 letter from the trenches — 미군 병사, 1918 참호로 부터 온 편지


긴장과 공포감 속에서 물만 부으면 녹아 기운을 차릴 커피 한 잔.

그 한잔의 커피가 그뿐만 아니라 모든 군인에게 행복감을 주었던지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은 커피 한잔이라 하지않고 ‘조지 한잔’이라 했다한다.

진한 커피에 물을 탄 커피가 자유의 상징이었듯 물로 녹여 마시는 커피는 행복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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