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Germany | 커피로 핀 이야기 꽃, 잔 아래 핀 진실의 꽃
1700년대까지 아침식사로 맥주와 달걀을 섞어 빵위에 부어 먹고 알코올로 흥청거리던 독일에 검은 성수가 대지를 적시고 정신을 깨우고 있었다. 1677년 부터 burg(城市 성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사는 Bürgertum(시민 | 독일의 부르주아지)들은 그들의 정신을 깨워주고 세련된 모습을 표현해주는 커피의 매력에 점차 빠져들었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은 커피 금지령으로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으로 그들에게 커피를 앗아갔다. 시민들은 커피가 아닌 대용품을 찾아 마시기 시작했고 진짜 커피는 아끼고 아껴 커피잔 바닥에 꽃이 보일정도로 옅게해서 마셨다.
독일의 남자들은 커피를 마시는 여성들을 압박했지만 여성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커피와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모임을 지금까지 전해오는 하나의 문화로 만든다.
독일의 남녀 모두 커피의 매력에 빠져 있었지만 삼각관계처럼 질투내고 못 만나게 했다. 하지만 커피의 매력이란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천번의 입맞춤보다도 더 달콤한 커피를 어떻게 포기할 수 있을까…
북해(North Sea) 가까이에 있는 천혜의 지리적 위치때문에 북독일의 경제중심지로 성장한 함부르크(Hamburg)는 1677년 커피하우스(Kaffeehaus)가 개점을 한다.
17세기 함부르크는 1년 내내 상인들이 드나 들던 국제적인 도시중 하나다. 특히 왕래가 빈번 했던 영국의 선원들과 상인들은 함부르크에 커피하우스를 간절히 원했다. 당시 영국에선 선원과 상인들이 대부분의 소식을 커피하우스에서 얻었기에 하루가 멀다하고 드나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함부르크 내에서도 그런 기능을 할 곳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함부르크에 커피하우스가 개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함부르크에 들어오는 커피도 영국 런던을 거쳐 해로를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덕분에 burg(城市 성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살고 있는 Bürgertum(시민계층)이 서서히 커피에 젖어갔다.
그들은 독일의 부르주아지(bourgeoisie)로 성 안에서 안전하고 윤택하게 사는 중류층 사람들이었다. 근대 자본주의를 형성하게 될 주역으로 수공업 및 상업에 종사했고 재산을 축적했던 그들은 새로운 사상으로 세상의 변혁을 꿈꾼 이들인지라 정신을 깨어있게 만들어 주는 커피야 말로 매력적인 음료였다.
함부르크 커피 산업의 근간이 되었던 영국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커피산업엔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도 조금씩 줄어들었지만 커피의 검은 물결은 시민계층을 타고 작센주(Freistaat Sachsen)의 라이프치히(Leipzig)로 흐른다.
17세기와 18세기 라이프치히는 독일 계몽주의의 근거지였고 문학과 예술의 중심지였다.
1632년 부터 개최된 라이프치히의 도서박람회는 현재까지 개최된 세계적으로 유서깊은 박람회이다. 서적이 모여들었고 문학가가 자리잡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인쇄업의 중심지로 발달했다.
1732년에는 바흐(Johann Sebastian Bach)가 함부르크에서 라이프치히로 옮겨왔다. 바흐와 더불어 많은 음악가들이 라이프치히에 모여든건 음악을 들어주는 시민이 있고 활동하기 좋은 환경이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라이프치히의 카페에서는 음악가들에게 연습실을 제공하고 커피하우스를 위해 연주회를 열었다.
새로운 사상과 정신을 따라 흘렀던 문화의 발전은 독일의 덜깨인 시민들의 가슴을 쳐댔다. 그리고 커피하우스는 그런 그들을 자극하였다. 그들은 커피하우스에서 커피의 맛을 보고 정보를 나누고 새롭게 생긴 커피마시는 풍습에 젖어들었으며 커피마시는 무리에 속한다는 연대감 마저 갖게 된다. 그 연대감의 근원은 Bürgertum(시민계층)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의 커피하우스에서 여성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커피하우스는 여성의 출입은 금지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여성들에겐 커피를 집에서 조차 마실 수 없도록 하였다.
독일 남성의 이런 모순적인 행동은 여성들의 새로운 커피문화를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18세기 독일 여성들은 멋지게 차려진 커피하우스에 가서 마리 앙투아네트와 같은 기품으로 커피 한잔 하고 싶어도 커피하우스 안에 들어서기만 해도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남자들의 시선때문에 결국 커피하우스 앞을 그냥 지나쳐야 했다. 집에서 조차 커피 한잔 마시려 하면 아버지 혹은 남편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쏘아 보면서 “마시면 안돼!!!”하는 무언의 압력을 주었다. 당시 커피는 불임을 유발한다는 풍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고난을 감내하고 마시려 해도 커피는 너무 비싸거나 없어서 치커리로 만든 가짜 커피를 마셔야 했을 지도 모른다.
독일의 여성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독특한 커피 문화를 만들어 낸다. 남편과 아이들을 챙기고 난 여유있는 오후에 친구의 집에 모여 돌아가면서 커피 모임(Kaffeekränzchen:카페클랜첸)을 갖기 시작한 것이 독일 전역으로 퍼져 하나의 문화가 된 것이다.
카페클렌첸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고 정신을 깨워주는 묘한 마력의 커피가 수다를 이끌어내고 공간의 따뜻한 정감을 제공했다. 그녀들은 커피를 마시는 동안 자신이 준비한 요리 레시피와 수공예 품을 선보이거나 수를 놓고 뜨게질을 하면서 수다를 하곤 했는데 초대한 주인은 계속해서 커피를 잔에 채워주었다 한다.
카페클렌첸(Kaffeekränzchen)은 훗날 남성들에 의해 비하되어 재잘거린다는 의성어가 어원인 Klatsch(쓸데없는 잡담)를 붙여 카페클라치(kaffeeklatsch)라 불렀으며 현재에도 이 전통이 커피를 겸한 다과회 정도로 남아있다.
당시 자료를 보면 여성의 커피 소비는 상당량에 이를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이는 독일의 여성들이 남편이 일하러 가면 가정에서 손님을 초대하여 커피 마시기를 즐겼으며 가정에서 커피를 준비하는 것은 여성의 몫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의 몫이 되어버린 가정에서의 커피 준비. 멜리타 벤츠 Melitta Benz 역시 그런 평범한 가정주부였으며, 그녀는 유난히 커피를 즐겨 마셨다. 그리도 즐겨마시던 커피를 내릴 때 마다 그녀는 한가지 의문에 사롭잡히게 된다. 커피 찌꺼기가 걸러지지 않는것 때문에 커피가 너무 강하고 아린 맛을 내는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생각하던 중 1908년 6월 어느 날 아침.멜리타 벤츠는 이런 고민을 해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황동 냄비 바닥에 여러 개의 구멍을 뚫고 큰아이가 쓰던 공책 한장을 뜯어서 동그랗게 오렸다. 그 압지를 큰 단지 위에 있는 황동냄비 바닥에 깔고 종이로 감싼 커피가루에 끓는 물을 부었더니 커피 찌꺼기가 밑으로 거의 내려오지 않아 전보다 맑은 커피가 만들어졌고, 맛과 풍미도 훨씬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족에게 맛있고 향이 좋은 커피를 주기 위한 생각에서 출발하여 고민 끝에 내놓은 간단한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이 아이디어는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종이 필터 발명의 시작이 된다.
1763년 프리드리히 대왕이 7년간의 전쟁을 끝내고 돌아와 폐허가 된 고국을 재건했다. 재건을 위해 제정적인 문제를 확고히해야 했던 그에게 거슬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커피. 커피에 대한 수입에 거액이 쓰이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맥주 산업이 쇠퇴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은 몹시 심기가 불편했다. 왕은 여러가지 법률적 제제 아이디어를 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특히 국가가 커피를 수입하고 왕이 설립한 커피 공장에서 볶은 원두만 사용하도록 했다. 7년 전쟁에서 부상을 당하고 돌아와 경제적 활동이 어려운 상이 군인에게 ‘커피냄새를 맡는’ (Die Kaffeeriecher)역할을 하여 단속을 맡겼다. 세금도 걷고 전쟁에 출전한 상이 군인의 복지도 해결하는 그야 말로 일석이조의 제도인 셈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지속적인 커피 탄압은 커피 산업을 주춤하게 만들었고 그와 더불어 수입을 하지 않고도 마실 수 있는 커피 대용품(muckefuck)을 탄생시킨다. 커피 대용품의 시작은 군인 폰 하이네 소좌 부인의 담낭병으로 고생할 때 치커리 뿌리를 달인 물로 효과를 본 것에 착안해 그들 부부가 브라운 슈바이크 시당국에 특허를 내고(1769) 양산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 후 보리, 호밀, 땅콩, 도토리 등 엄청난 종류의 커피 대용품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커피 대용품의 등장으로 시민계급은 오히려 진짜 커피에 대한 열망이 더 커졌다. 귀한 커피를 아껴 마시기 위해 커피에 가능한한 많은 물을 타서 정말 고급스러운 중국 도자기 커피잔에 마셨다.
당시 작센주의 마이센(meißen) 도자기는 중국 도자기를 보고 만들었고 커피잔 바닥에는 꽃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었는데 그 잔에 옅은 커피를 마시다보니 바닥의 꽃이 보였다. 그런 커피를 ‘작은 꽃 커피 (Blumchenkaffee)’ 불렀다. 커피 대용품은 마이센 잔에 따랐을 때 꽃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커피가 진품인지 가품인지 잔 밑의 꽃을 보고 알았다 한다.
아랍에서 검은 성수로 그 위상을 떨치던 커피는 독일의 마초같은 대왕의 커피 금지에 대한 굳은 의지로 점차 가짜와 허영을 상징하는 음료가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