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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커피여정

자바에 열린 동인도상인의 열매

인도네시아, Indonesia | 티피가 종이 만난 새로운 환경

by 비오


자바에 열린 동인도상인의 열매 내용 요약


커피 나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제야 실험용 온실의 토양과 커피 나무가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실로 오랜 만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니콜라스 비췐(Nicolaas Witsen)은 어린 커피 나무를 보면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 많다는 것에 대한 기대감에 흥분했다.


1696년 당시 55세의 비췐은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새로운 사업을 찾아 모험을 감행하고 스스로를 바쁘게 만드는 자신에게 자부심마저 느끼는 귀족 출신의 그는 귀족이란 의무감으로 암스테르담 시장을 13번이나 역임했다. 그런 그가 1602 년에 설립된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 동인도 주식회사(V.O.C.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의 경영까지 맡게 되면서 동인도 회사의 재원을 마련해줄 방법을 계속해서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랍의 잠잠성수라 불리는 커피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식물학에 조예가 깊었던 비췐은 만일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재배가 성공한다면 재원도 해결되지만 미래까지도 보장된다는 생각을 하니 하시라도 빨리 재배에 필요한 일들을 해야만 했다.


니콜라스비췐.png [그림 1] 니콜라스 비췐


온실 속 실험의 시작은 바바 부단이 인도에 가지고 온 일곱알의 커피 씨앗으로 부터다. 커피 씨앗은 찬드라기리를 시작으로 인도 남부의 말라바르까지 커피 나무를 퍼뜨렸다. 1670년 부터는 유럽으로 수출까지 하고 있고 유럽은 쿰쿰한 향내를 퍼뜨리는 인도산 커피에 이국적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비췐은 엄청난 생명력을 가진 인도 말라바르의 커피나무를 구하고 싶었다.

1616년 피터 반 덴 브뢰코(Pieter Van den Broecke)가 모카에서 네덜란드로 들여와 온실에서 키우다 1658년 실론(현재 스리랑카)에서 상업적 재배에 성공한 커피 종자도 구할 수 있었지만 42년이란 시간이 걸려 성공한 까다로운 종자를 선택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비췐은 인도의 말라바르에 주둔 중인 군의 사령관인 아드리안 반 오먼(Adrian Van Ommen) 장군을 얼르고 달래기를 반복하여 커피 묘목을 얻었다. 얻어온 커피 묘목을 말라바르의 기후와 비슷하게 만든 자신의 온실에 키우는 동안 비실거리며 속을 태우고 있다가 이제야 겨우 토양에 적응하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이제 이 나무의 생장 시험이 성공하면 동인도 자바에 있는 자신의 조카에게 보내야 한다. 비췐의 가슴은 묘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본국에 있는 삼촌에게 연락을 받았다. 근시일내에 귀한 생명 하나를 보낼테니 잘 보살피면 동인도 회사의 성공적인 식민지 사업을 영위할 수 있다는 내용도 함께 들어있었다.
니콜라스 비췐의 조카 요한 반 호른(Joan van Hoorn)은 온 가족이 1663년 동인도로 옮겨왔다. 화약상이었던 아버지의 사업이 신통치 않아서 였다. 1665년 12살 나이에 그는 동인도 회사의 일을 시작했다. 그는 단순히 실적과 경력만을 쌓는 사람이 아니었다. 현지 사람들에게 신뢰받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한 그는 모든 일처리에 대해 동인도 지역과 그 안에 사람들을 한번 더 생각하고 신중하게 행동했다. 그러다 보니 현지 사람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게되었고 1684년 서른 두살 나이에 반 힘라덴 대학(the College van Heemraden)의 총장까지 역임한다.


[그림 2] 요한 반 호른


현지인들의 평판덕분에 당시 네덜란드 식민 정부의 총독 윌렘 반 아웃호른(Willem van Outhoorn)의 신망도 대단해서 요한이 아내와 사별했을 때 그를 사위로 맞이(1692)하기도 했다. 그 일로 후에 그는 장인의 낙점으로 총독의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


당시 네덜란드 식민정부 총독 연표 일부

1691~1704 Willem van Outhoorn 빌름 반 아우트호른
1704~1709 Johan van hoorn 요한 반 호른
1709~1713 Abraham van Riebeeck 아브라함 반 리베익
1713~1718 Christoffel van Swoll 크리스토펄 반 스볼
1718~1725 Henricus Zwaardecroon 헨리쿠스 즈바르더크론


1969년 니콜라스 비췐이 보낸 커피 묘목이 요한에게 도착했다.

커피 묘목을 보고 있자니 삼촌의 열정과 정성이 느껴졌다. 요한은 꼭 성공해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재배를 위해 현지인들을 설득했고 그들은 수긍했다. 현지인들을 움직인 건 강한 국가의 강요가 아니라 한 사람을 존경했기 때문이었고 자바의 커피 농사는 자발적인 현지인들의 노력과 정성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첫번째 재배는 실패로 돌아갔다. 태풍으로 섬 전체가 초토화 되었고 커피 농장의 커피나무도 다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실패의 경험을 딛고 시작된 두번째 재배가 성공하고 1706년 삼촌에게 성공의 낭보와 함께 생두샘플과 어린나무를 보낼 수 있었다. 비췐이 받은 어린커피 나무는 네덜란드 국립 식물원에서 자라기 시작한다. 후에 이 커피 묘목들은 유럽의 귀족의 온실로 보내져 또 다른 여정을 준비한다.
1707 요한 반 호른은 치르본(Cheribon)과 자카트라(Jacatra 현 자카르타)에 커피 묘목을 나눠주었다. 유럽에서 커피수요가 점점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어린 식물이 네덜란드 뿐만아니라 현지인들의 생계도 마련해줄 수 있을 거란 확신때문에 재배를 확대하기로 한 것이다.

이런 커피 농사의 확대에 기여한 또 한 사람이 있다. 헨리쿠스 즈바르데크룬(Henricus Zwaardecroon)은 요한이 1701년 장인에 의해 네덜란드 식민 정부 총독에 낙점되었을 때 경쟁자였던 최고위 공무원 중 한 사람이다. 이 때 요한은 장인에 의한 총독 취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경쟁자였던 3명의 최고위 공무원들이 마음으로 그를 받아들여줄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헨리쿠스는 아마도 이 때 요한의 진정한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마음쓰는 커피 사업을 헨리쿠스도 또한 받아들인 모양이다. 1699년 그는 접지용 커피묘목을 자바에 이식해 성공했다. 이 묘목들은 다시 수마트라(Sumatra), 셀레베스(Sulawesi 술라웨시섬), 티모르(Timor), 발리(Bali) 등으로 확대했고 동인도령 커피재배의 출발점이 되었다.


동인도제도_지명.png [그림 3] 동인도제도


모카에서 인도를 거쳐 자바로 들어온 커피 나무는 자바섬과 동인도를 온통 뒤덮게 된다. 그리고 커피라는 상품에 모카에 이어 자바라는 이름을 입힌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인정받는 커피는 모카항에서 수입한 모카커피였다. 자바에서 수입한 커피가 무너뜨리기엔 너무도 단단한 아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유럽인들은 계속해서 모카커피를 찾았고 자바커피도 유럽의 항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연치 않게 어쩌면 필연적으로 모카커피와 자바커피가 원두 상태로 섞이기 시작했다 한다. 그 커피의 맛을 본 이들은 새로운 맛에 열광하기 시작했고 여러 지역의 원두를 섞어서 맛을 보완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세계 최초의 블랜드(Blend : 서로 다른 원두를 섞어 만든 원두의 조합으로 새로운 맛을 내는 방법 및 명칭) 모카자바(Mocha Java)가 탄생하기에 이른다. 우연하게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블랜드 커피의 탄생이었다.


모카자바상표.png [그림 4] 자바 모카 블랜드 상표들


유럽 시장에서의 자바 커피의 승승장구는 요한의 생각과 다르게 오히려 현지인들을 괴롭혔다. 네덜란드인 농장주들은 현지인들에게 임금을 거의 주지 않고 핍박했으며, 허비되는 커피를 없애고 생각과 대화를 이끌어내는 현지인들의 커피 마시기를 금지했다. 이미 커피의 맛을 보았던 현지인에게도 커피에 대한 매력은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루왁(사향고양이)의 배설물에 섞여있던 원두를 보게 되었다. 루왁의 배설물마다 있는 원두를 모아서 커피를 마셔보니 본연의 커피 맛에는 없던 특별한 맛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 후 현지인들은 루왁 커피를 즐겨마시게 되었는데 이를 상품화해서 루왁커피가 탄생했고 엄청난 인기 덕분에 어마어마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의 루왁커피는 본질을 잃게 되었다. 루왁 커피가 맛있는 이유는 사향고양이가 가장 잘익어 맛있는 커피 체리를 먹고 체리 속 씨앗은 그대로 위에 남아 효소에 의해 단백질이 분해되어 발효된 풍미가 더해져 만들어진 맛이었다. 한마디로 맛있는 것을 즐겁게 먹고 소화시킨 행복함의 산물인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루왁 커피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사향고양이를 가두고 사육하며 커피 체리를 먹여 만들어진 루왁커피는 자유롭지 못하고 불행해진 루왁이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도 루왁 커피는 마케팅에 힘입어 아주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는 원두 중에 하나이다.


루왁.png [그림 5] 사향고양이{루왁}


루왁 커피와는 조금 다르지만 발효된 커피의 맛이 더 맛있는 커피가 있다.
차가운 발효(숙성)에 의해 맛이 더해진 더치 커피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무역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설도 있다. 사실 이 이야긴 역사적 근거에 남겨져 있진 않다. 17세기 일본 나가사키에 진출한 동인도 회사의 상인들이 찬물에 10시간 이상 추출해 마시는 것을 본 일본 사람들에 의해 부활한 커피가 더치 커피(교토 커피)이다. 동인도 회사의 상인들은 배에서 불을 사용하거나 뜨거운 물을 사용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오랜 항해 동안 커피를 마시려면 찬물로 내려야 하는 방법밖에 없었기에 만들어진 방법이다. 그런데 이 더치커피 조차도 일정기간 숙성을 거치면 와인의 풍미가 나는 커피가 된다.



각종더치기구.png [그림 6] 각종 더치 커피 기구들


어쩌면 발효는 환경과 사람들의 창의에 의해 만들어진 의도적 방법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모카를 거쳐 자바에 들어 온 아라비카 커피 원종은 동과 서의 묘한 조합으로 새로운 커피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이제는 유럽 전역으로 퍼질 커피나무의 열매를 맺게 된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 수록 식민지배의 현지인들의 삶은 고달파져 가기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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