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티니크 Martinique | 라틴 아메리카로 퍼진 티피카
오스만 투르크 대사 솔리만 아가가 다녀간 뒤 루이 14세(1669년 당시 31세)는 혼자 덩그러니 앉아 왠지 모를 공허함에 휩싸였다. 이교도의 나라지만 강한 군을 가지고 있는 나라에 기를 눌리지 않기 위해 부린 루이 14세의 허세 앞에 대사는 소박한 차림이었지만 당당하게 서있었다. 프랑스 로코코의 사치스러움과 화려함이 오스만 투르크의 신비주의의 소박함에 참패를 당한 느낌이었을까? 게다가 아랍 최고의 음료요 성수라고 불리는 커피는 왜 그리도 거칠고 쓴지 아직도 입안이 얼얼했다. 오스만 투르크 사람들은 도대체 왜 이런 음료를 성수라 떠 받드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샴페인과 와인이 이리도 훌륭한데 말이다. 루이 14세와 커피의 첫 조우의 기억은 탐탁치 않은 만남과 그 뒤에 오는 씁쓸한 여운만 남는 것이었다.
하지만 루이 14세는 커피 나무를 프랑스 영토 안에 심고(1714년 당시 76세) 전 세계에 퍼뜨리는 데 막중한 역할을 한 왕이 된다.
루이 14세의 궁정에 솔리만 아가가 다녀간 후 궁에 자주 들락거리는 귀족들은 언제부터인가 모이면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오스만의 대사가 머무는 파리의 한 저택에서 이국적이고 호사스러운 대접에 초대되어 갔다 온 이들은 하나같이 침을 튀며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솔리만 아가 대사는 프랑스 귀족들의 입맛에 맞게 설탕을 가미한 커피로 강한 쓴 맛을 감추는 달콤함을 더했다. 한 번 맛보면 잊을 수 없는 커피향과 설탕의 달콤한 맛은 귀족들을 매료시켰고 온 궁정으로 퍼져갔다.
루이 14세도 이 맛에는 천천히 매료되어 갔다. 그리고 루이 14세에게 커피는 씁쓸한 과거의 기억에서 달콤한 미래의 희망으로 생각되기 시작한다. 점점 사람들에게 퍼져가는 커피에 세금을 부과한다면 세수가 증대할 것이다. 그러면 화려한 사치로 인해 항상 부족한 재원을 매꿀 수 있지 않을까?
루이 14세에게 커피란 미래의 풍족한 삶을 보장해줄 오스만 투르크의 선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커피에 세금을 부과하고 커피값이 올라간 후 프랑스 내에 커피 소비는 점점 줄어들어 루이 14세가 바라는 만큼 수입이 생기지 않았다. 답답한 상황을 지켜보던 루이 14세에게 세계적으로 늘어가는 커피의 교역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교역을 하려면 커피를 재배해야 하는 데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뜻밖에 기회가 타국에서 날아들었다.
1706년 네덜란드의 니콜라스 비췐(Nicolaas Witsen)은 조카 요한 반 호른(Joan van Hoorn)에게 받은 자바섬의 어린커피 나무를 네덜란드 국립 식물원(Hortus Botanicus Amsterdam)에 보냈다. 세계 교역에 떠오르는 샛별 식물원의 커피나무는 적도 커피벨트의 환경에 맞춰져 세심하게 관리되었고 건강하게 자라났다.
암스테르담의 커피나무가 프랑스로 건너간 것은 1714년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지방정부 시장 헤릿 호프트(Gerrit Hooft)이 프랑스와 교역에 대한 협정을 체결하고 그 기념으로 루이 14세에게 1.5미터 길이의 싱싱한 커피 묘목 하나를 선물한 것이다. 선물 받은 다음날 커피 묘목은 루이14세의 철저한 보호 아래 파리 식물원 (Jardin des Plantes) 에 조심스럽고 안전하게 이식되었고 식물원에 커피나무가 심어지는 날 프랑스의 식물학자 앙투안 드 쥐시외(Antoine de Jussieu, 식물분류학의 대가)의 주제로 기념식도 거행되었다.
암스테르담의 선물 커피 묘목은 이제 막 파리 식물원 한 켠에서 숨고르기를 시작했지만 커피 재배를 통해 교역을 꿈꾸었던 태양왕 루이 14세는 얼마 지나지 않은 1714년 9월1일 그 명을 다했다.
개인적인 용무로 파리로 돌아오긴 했지만 마르티니크에서 파리로 돌아오는 길은 멀고도 위험해서 왠만하면 오지않고 모든 일을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이번 귀국길은 그에게 있어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마르티니크의 해군장교 가브리엘 드 클리외(Gabriel Marthieu De Clieu)는 이번 귀국길이 어쩌면 조국을 위해 애국하는 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파리 식물원에 그 귀하다는 커피나무가 9년간 자라고 있다. 네덜란드로부터 선물받은 커피는 아랍에서 직접 가져 온 나무의 후손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이 나무를 구해야 한다. 꼭 구해야 한다.
루이 14세가 서거한 후 즉위한 루이 15세는 고집불통의 십대소년이었다. 드 클리외는 왕을 만나기도 어려웠지만 그를 설득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커피 나무 두 그루만 있으면 마르티니크 섬 전체를 커피 농장으로 만들겠다는 말을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여러 번 청원했지만 번번히 거절당했다.
드 클리외의 기록중에서
여러 달을 기다리며 궁리를 거듭하던 드 클리외는 궁정 내과의사 드 시락(Dr. M. De Chirac)과 접촉할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드 시락 박사는 궁정에서 내과의사이면서 의약연구를 목적으로 온실안에서 식물에 대해 연구를 담당했기 때문에 커피 나무를 쉽게 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때문이었다. 드 클리외는 자신의 여자친구를 통해 드 시락 박사에게 접근해 부탁했다. 그리고 드디어 드 클리외는 커피나무 꺽꽂이 할 수 있는 가지를 얻어냈다. 꿈에 한발 다가선 그는 마르티니크로 돌아가는 배편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1723년 드 클리외와 커피 나무를 태운 르 드로마데르호(Le Dromedaire 단봉낙타)는 낭트에서 출발해 마르티니크로 향했다.
드 클리외는 귀하고 여린 어린 가지를 긴 여정동안 살려서 가져가기 위해선 휴대용 온실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나무 상자 한면을 유리로 붙인 다음 철사로 감았다. 휴대용 온실은 바람이 잘 통하도록 만들어진데다 유리로 붙여진 부분은 햇살이 잘 들어왔고 철사로 보호가 되어 있어 쥐가 갉아서 손상을 입힐 수 없도록 제작되었다. 휴대용 온실 안에서 초록 빛 잎에 생동감이 도는 걸 볼 때마다 드 클리외의 꿈도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순항하던 르 드로마데르호가 몇 주 만에 세운건 튀니지 해적이었다. 모두가 잠든 한 밤중에 기습한 해적이었지만 대포를 26문이나 가지고 있던 배였기에 해적들의 습격으로 부터 피할 수 있었다. 그보다 더한 위협은 가까이 있었다. 한 동안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느낀 드 클리외는 그가 자신의 커피 나무를 해하려 함을 알게된다.
드 클리외가 문예연보에 보낸 서간(letter to the Année Littéraire)
암스테르담 시장은 커피 나무를 선물로 주었지만 당시 네덜란드령 자바의 커피 농사는 성공적이었다. 교역도 모카항 다음으로 늘어나는 추세여서 다른 나라의 커피 농사소식은 달갑지 않았던지 스파이를 보내 이를 해하려 했던 모양이었다. 아랍인들처럼 잇권을 빼앗기기 싫었던 것이다.
스파이는 커피나무를 없애기 위해 바라보고 있었지만 좀처럼 기회가 나지 않았다. 낮에는 드 클리외가 그 주위를 지키고 있었고 밤에는 그의 방에 넣어두고 방문을 잠궜기 때문이다. 빈틈없이 지켰음에도 기회는 왔었던 지 스파이가 감겨있는 철사 사이로 손을 넣고 가지를 꺾으려 할 때 드 클리외와 몇 사람에게 발각되어 붙잡혔다. 하마터면 커피나무 가지가 손상되 모든 수고가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던 위험을 피했다.
스파이의 위험이 사라진 후에도 커피가 마르티니크로 가는 길은 여전히 험난했다. 여정이 한 달여 남은 시점에 르 드로마데르호는 열대 폭풍을 만났다. 치명적인 손상은 없었지만 배가 갈라지는 사고 덕분에 배 안에 무게가 나가는 짐은 모두 바다에 던져졌다. 필요한 양만큼을 제외한 물도 버려졌다. 이 때문에 배는 식수공급을 철저히 하게 된다. 한 사람이 하루에 마실 물의 양을 절반으로 정해 배급을 주었던 모양이다. 드 클리외도 예외없이 그만큼의 양 만을 배급받았으니 커피 나무를 위한 물은 없는 것이었다.
이 어려움에도 꿈을 위한 낭만가 드 클리외는 자신의 물을 커피 나무에게 나눠주며 자신과 여린 커피나무의 목숨을 지탱해나갔다.
여러 어려움을 딛고 마르티니크에 도착했던 드 클리외는 새끼 손가락 만한 커피 묘목을 프레쇠르(Le Precheur)사유지에 옮겨심어 정성껏 가꾸기 시작한다. 그 곳이 커피 나무가 성장하기 최적의 장소라 여긴 것이다. 르 드로마데르호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이 생각났다. 노심초사했던 배안의 기억들이 그를 옹죄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커피나무를 심은 그 주위로 가시덤블을 덮었다. 커피나무가 자라는 동안 외부의 방해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드 클리외는 자신을 어루만지듯 어린 커피 나무를 어루만지고 보호하여 소중하게 가꾼다. 그리고 노력끝에 얻은 것은 커피 종자 2파운드(약 907그램)였다. 종자는 커피 재배에 희망적인 사람들에게 나뉘어졌고 드디어 마르티니크에 커피 농사가 시작되었다.
첫번째 수확은 상당히 좋았다고 그는 기록에 적고 있다. 그리고 그의 꿈을 앞당겨줄 기회는 자연의 재해에 의해서였다.
1727년 11월 마르티니크를 비롯한 서인도 제도에 사이클론이 발생한다. 당시 서인도 제도의 주된 농사는 카카오 재배였기때문에 이 태풍으로 카카오 플렌테이션은 전부 물에 잠기고 말았다. 카카오 나무의 대부분을 잃은 토착민들에게 드 클리외가 커피 재배를 권장하고 종자를 나누어주었다. 두 번째 농사는 이들 지역에서도 커피 농사가 성공해 더 많은 양을 수확할 수 있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마르티니크 주변 서인도 제도로 커피가 퍼져나갔다.
1734년 부터는 커피가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게 되어 급기야 이슬람으로도 수출이 되었다.
이슬람에서 인도로 인도에서 네덜란드로 갔던 커피가 프랑스를 거쳐 마르티니크 온 커피는 다시 이슬람의 나라들로 재수출되는 순환의 고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에티오피아에서 마르티니크까지 커피의 여정은 멀고도 길었지만 전 세계가 얻은 것은 아비시니아(Abyssinia) 고원에서 발견한 원종에 가장 가까운 티피카(Typica)라는 종이다. 티피카(Typica)라는 단어는 스페인어로 Typical의 의미로 말그대로 대표적인 것을 뜻한다. 브라질을 제외한 중남미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므로 스페인의 단어로 이름이 붙은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중남미에 와서 비로소 이름을 얻은 티피카는 뛰어난 품질을 가지고 있어 최고의 맛과 향을 가지지만 그늘재배가 필요하며 질병과 병충해에 약하다. 게다가 격년으로 생산해야하고 생산량이 매우 낮다.
티피카는 브라질을 제외한 중남미와 카리브해 연안국가, 자메이카로 종자가 퍼져 갔다. 그 중 자메이카로 간 티피카는 명품 중에 명품 커피를 태동시킨다.
자메이카 킹스톤의 뒤쪽에 위치한 블루마운틴의 아침은 언제나 차가운 공기에 안개가 짙게 드리운다.
상쾌한 아침이었지만 자메이카의 총독 니콜라스 로우(Nicholas Lawes)에겐 무거운 하루의 시작이었다. 악명높은 해적에 대한 재판이 있기 때문이다. 재판에 회부된 자들은 존 래컴(John Racome)이 이끄는 해적들이었다. 존 래컴은 칼리코 잭(Calico Jack)으로 더 유명했는데 그 이유는 목양천(Calico)으로 만든 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이다. 유래없이 치졸하고 독특한 해적들의 재판이었기에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칼리코 잭이 이끄는 해적들은 작은 배들만 골라서 습격하는데다가 여성을 배에 태우지 않는다는 해적들의 불문율을 깨고 여성 해적 메리 리드(Mary Reade)와 애니 보니(Anne Bonny)가 무리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재판에서 그들까지도 같이 재판해야 한다. 그것도 임신한 여성해적을…
재판에서 칼리코 잭은 교수형을 언도받았지만 여성 해적 둘은 사형은 면했다. 그리고, 니콜라스 로우는 그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다. (1720) 이 날 재판으로 칼리코 잭이 도안한 깃발(졸리 로저 Jolly Roger : 해적 깃발)은 해적의 상징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카리브 해의 해적들이 영국 해군에 의해 채포되면 본국까지 가지 않고 자메이카에서 니콜라스 로우 총독이 재판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전 세계 선박의 물동량에 대해 자연스레 알게되곤 했다. 오가는 물동량 중에 커피를 주목하게 된 것은 유럽인들에게 향신료, 설탕 다음으로 커피의 붐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느 해 부터인가는 커피의 수출입이 아닌 농사가 가능한 커피 나무가 오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자메이카에서도 훌륭한 수입원 하나를 추가할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이웃한 마르티니크에서도 드 클리외라는 해군 장교가 커피를 들여와 성공적으로 커피 농사를 하고 있다. 1727년 사이클론이 발생하고 카카오 밭이 쑥대밭이 되었을 즈음 드 클리외는 커피 종자를 퍼트리기 위해 토착민이면 누구에게나 나누어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니콜라스 로우는 이 때 부터 커피 종자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1728년 니콜라스 로우는 고대하던 커피 묘목 하나를 마르티니크의 총독 쟝 프랑세즈 루이 드 브라크(Jean François Louis de Brach)로 부터 선물받았다. 여리여리한 커피 묘목 하나가 그의 손에 쥐어진 순간 자메이카의 명품 커피도 태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니콜라스 로우는 선물받은 커피 묘목을 자신의 소유지 세인트 앤드류 성(현재 세인트 앤드류 교구)에 심었다. 왠일인지 커피나무는 무탈하게 잘 자라났다. 마치 이런 땅을 기다렸다는 듯이 잘 자라나는 커피 나무를 보면서 그는 성공적인 커피 농사의 앞날을 보는 듯 했다.
태양이 섬 전체에 바다의 빛깔을 반사시켜 푸르게 보인다하여 붙여진 블루마운틴이란 이름처럼 이 지역은 풍부한 태양광선이 내리 쬐고 짙은 안개와 풍부한 비가 내리는 곳이었다. 티피카 종은 그늘 재배를 위해 큰 나무 밑에 커피나무가 있어야 하지만 블루마운틴에서 그 역할은 안개가 대신 해주었다. 거기에 밤낮의 큰 일교차와 높은 고도는 커피를 더욱 알차고 실하게 만들어 주어 실로 최적의 재배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게다가 경사면에서 커피를 재배할 수밖에 없는 환경덕분에 익은 커피를 하나하나 손으로 수확할 수 밖에 없었다. 노역은 힘든 일이었지만 사람의 손으로 한알한알 수확한 커피의 맛은 이제까지 출시되었던 어떠한 커피보다도 우아한 맛을 갖고 있어 ‘커피의 황제’라는 별칭까지 붙었다.
첫 수확후 커피 묘목은 포틀랜드 성과 토머스 성으로 이식되어져 재배되기 시작한다.
1791년에는 아이티 혁명(Haitian Revolution, 1791-1804)으로 탈출한 사람들이 자메이카로 유입되면서 그들의 커피 농사 경험이 자메이카 커피 농사에 큰 힘이 되어주었다. 이후 자메이카의 커피 수확량은 급격히 늘어났다.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커피는 커피의 이름이 아니라 지역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블루마운틴이라는 천혜의 자연은 자유를 쟁취한 사람들의 손길을 만나 맛과 향이 뛰어난 커피 원두 브랜드가 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해를 거듭하면서 블루마운틴에서 생산된 커피의 명성은 높아만 갔다. 1930년대 들어서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커피는 수확량이 판매량을 따라잡기 어려워지자 각 농장들은 커피 생산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커피의 품질은 떨어지고 명성 또한 바닥으로 곤두박질을 친다. 이후 30여년간 땅에 떨어진 명성을 예의 위치로 올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자본의 부족으로 번번히 실패를 거듭했다. 여기에 일본의 자본이 1969년 자메이카로 유입되었다. 그리고 해마다 생산된 블루마운틴 커피를 전량 구매해가곤 하며 자메이카의 커피 산업을 지지했다.
뼈아픈 시련을 겪었던 자메이카의 커피 관련 회사들은 엄격한 제도와 기준을 함께 만들었다. ‘블루마운틴’이란 이름을 붙이려면 해발 고도가 2,000m 이상의 장소에서 재배된 것이어야 하고 맛의 안정을 위해 균일한 크기만을 오크 나무통에 넣어 다른 커피와 다르게 보이도록 만들어 판매했다. 거기엔 산지 출처가 적힌 품질보증서를 넣어 자신의 농장제품을 공인하도록 했다. 이런 노력들이 하나로 모아져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은 예의 명성을 되찾기 시작했고 이를 공고히 하기 위해 자메이카 커피산업협의회(JCIB : Jamaica Coffee Industry Board)를 만들어 특정 지역에서 생산되는 커피만을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으로 인정하는 것을 법률로 제정했다.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커피를 생산하는 농가 중 월렌포드는 자메이카 정부의 산하기관으로서 소작농들의 커피를 수거해 기준에 따라 철저히 검증하여 만들어 낸다.
티피카의 여정은 원산지 아비시니아(현재 에티오피아)에서 인도를 거쳐 유럽과 그 식민지까지 험로를 거쳐왔지만 각 지역의 테루아(terroir, 프랑스어로 토양, 풍토)와 만나 독특한 형질을 더해 최고의 맛을 지닌 커피로 거듭나고 있다.
1500여년 전 원종 커피의 맛을 보려면 각 지역의 티피카 커피의 맛과 향이 가지고 있는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