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봉 Bourbon | 지역마다 다른 커피 부르봉
에티오피아에서 건너 온 커피가 풍성하게 자라던 16세기 예멘. 베네치아와 마르세이유에서 온 상인들이 커피를 흥정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16세기에서 17세기 입에서 입으로 퍼져 유럽을 감싼 아랍 성수 커피의 마력이 유럽인들을 들썩였기 때문이다. 교역이 이루어진 초기 커피 무역은 예멘에서 수확된 커피가 제다(Djeddah, Jeddah)항에 모인 후 유럽으로 보내졌다. 두 상인들의 커피 무역을 바라보던 네덜란드 상인들은 후발 주자로 나섰지만 뒤쳐진 커피 무역의 주도권을 갖기 위해 국가의 힘을 빌어 모카에 교역소를 차렸다. 모카 교역소에서 거래를 마친 커피는 네덜란드 령이었던 바타비아(현 자카르타)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방식의 항로였다. 이 길은 유럽으로 가는 주된 커피 무역항로가 되었으며 모카(Mocha(영), Maka(프))라는 항구의 이름은 전 유럽인에게 커피를 부르는 다른 이름이 된다.
이 시기 프랑스에선 오스만 튀르크 대사가 루이 14세의 궁정을 다녀간 후 모카에 대한 사랑이 귀족부터 서민으로 급속히 번져갔다. 프랑스 국민의 커피 사랑으로 루이 14세는 모카 수입 판매상에게서 세수는 확보를 했지만 사치와 낭비로 얼룩진 그의 삶을 지탱하기엔 성에 차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모카 나무가 자라는 곳과 환경이 비슷한 식민지령에 커피나무를 심어 산지를 갖고 더 많은 수입을 올려야 겠다는 곳까지 미친다. 이에 식민지령을 관리하고 무역도 할 수 있는 프랑스 동인도 회사(Compagnie française pour le commerce des Indes orientales)를 지원해 새로운 커피 로드 루트개발과 더불어 부가가치를 얻어낼 수 있는 산지를 만들고자 하는 새로운 생각을 갖는다. 루이 14세는 예멘의 술탄에게 커피 나무를 청하고 답을 기다리고 있었고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모카와 모카 산지에 대한 확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골몰히 생각했다.
모카를 확보하기 위한 처녀 원정은 영국 더블린 태생이지만 프랑스로 망명한 필립 월시(Phillip Walsh)가 리더로 발탁된다. 필립 월시는 프랑스의 생말로에선 상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1708년 1월 6일 Phillip Walsh가 이끄는 Curieux호와 Diligent호가 프랑스의 브레스트(Brest)에서 출항했다. 스페인에 카디스에서 기항한 원정단은 예멘의 모카항으로 향했다. 원정단이 모카항 네덜란드 교역소에 도착한 시기에 모카의 인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모카항 인구는 만여명 정도로 늘어나 있었다.
모카에 대한 거래를 마친 후 귀항하던 모카 원정단이 마다가스카르에 잠깐 들렀을 때 필립 월시는 황열병에 걸리고 만다. 1708년 9월 11일 필립 월시는 모카 원정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채 숨을 거둔다.
리더를 잃은 모카 원정단이 1710년 5월 8일 생말로에 도착했을 때 배에는 대략 1300톤 정도의 커피가 실려있었다.
그로 부터 3년 후 앙투안 크로잣(Antoine Crozat)은 Paix 호와 Dilignet 호 두 척과 함께 두번째 모카 원정단을 결성하고 출항한 후 몇 개월이 지난 1711년 6월에서 7월 경 생말로에 복귀했다. 원정단의 배엔 1,600톤 가량의 커피가 실려 있었다.
첫번째 원정 이후 3년이란 시간동안 사람들은 맛있는 모카의 맛을 알기 시작했고 유럽의 카페들이 만들어내는 모카의 문화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두번째 원정 이 후 루이 14세와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커피를 사들여 교역하기 보다는 훌륭한 산지를 갖아야 한다는 강렬한 욕망이 들끓었다. 그리고 루이 14세와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인도양의 섬 하나를 떠 올린다.
프랑스 최고 절대 왕정의 상징 ‘부르봉’ 왕가의 이름을 가진 섬이었다.
포루투갈인 페드로 데 마스카레나스는 1512년 인도양에서 세개의 섬들을 발견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마스카렌제도(마스카렌 諸島 Mascarene Islands)는 현재 모리셔스(Mauritius island), 로드리게스(Rodrigues island), 레위니옹(Réunion island) 으로 이루어 진 다도해이다. 하지만 당시 마스카레나스의 나라 포루투갈은 섬에 주민을 정착시키거나 지배하지 않았다.
1642년 세 개의 섬 중 가장 서남쪽에 있는 섬 하나는 프랑스 동인도 회사가 아프리카 최남단을 돌아 인도로 가는 길에 기착지로 사용하기 위해 섬에 주민들을 정착시키고 프랑스의 땅으로 만든다. 루이 13세는 이 섬을 자신의 왕가 부르봉이라는 이름을 하사하며 섬의 이름은 ile Bourbon 이 되었다.
1711년 당시 734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던 부르봉의 실질적인 지배는 프랑스 동인도 회사가 하고 있었다. 섬에는 프랑스 지주와 아프리카, 말라가시 노예가 정착해 살고 있었다.
루이 14세에겐 선왕 루이 13세가 지어 준 자신의 왕가의 이름을 가진 친숙한 섬이었고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주인 없는 이 섬을 독점적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니 어쩌면 부르봉 섬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루이 14세의 의중을 확인한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세번째 원정과 함께 섬을 모카 농장으로 만들기 위한 준비를 한다.
두번째 원정 3년 후 1714년 3월 21일 기욤 두프레네 다르셀(Guillaume Dufresne d’Arsel)이란 선장의 지휘아래 Chasseur호와 Paix호 두척으로 구성된 세번째 모카 원정단이 출발한다. 순조롭게 항해하던 1715년 6월 27일 원정단의 뱃전에 루이 14세가 보낸 배 L’Auguste호가 당도한다. 그리고 배로 부터 왕명과 함께 모카 나무가 하달된다. 부르봉 섬에 커피 나무 농장을 구축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명을 내린 루이 14세는 결과를 지켜보지 못한다. 그로 부터 9개월 후 세번째 모카 원정의 임무가 채 완료되기 전에 루이 14세는 77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기 때문이다.
절대 권력자 루이 14세가 서거한 후 세번째 원정단 기욤 두프레네 다르셀은 재빨리 모리셔스 섬으로 향해 가며 스스로를 왕이라 참칭하고 1715년 9월 20일 정착한다. 그리고 브루봉 섬에 왕명과 함께 전달된 커피 나무를 생폴지역에 심어 커피 농장을 시작한다. 이 때 심어진 커피나무는 루이 14세가 예멘의 술탄에게 청을 넣어 기다림 끝에 받은 나무였다.
프랑스 왕가의 이름으로 불린 섬이 예멘 술탄이 보낸 모카 나무를 감싸 안아 새로운 커피 하나가 탄생했고 그 커피의 이름 또한 ‘부르봉’이었다.
부르봉 섬에서 탄생한 부르봉 종 커피는 브라질을 포함한 중남미와 아프리카의 영국령 케냐, 우간다, 탄자니아 등지로 퍼져나갔고 티피카와 더불어 가장 많이 확산되어 간 아라비카 종 중 하나가 된다.
루이 13세는 섬의 이름을 하사하고 루이 14세는 섬에 나무를 안겨주며 탄생한 부르봉 커피를 루이 15세는 왕의 커피 즉 Cafe Du Roy 라 불렀다 한다.
부르봉 품종은 자라나는 지역의 테루아(Terroir)를 받아들여 본연의 모습에 자라나는 지역의 좋은 점을 담아 진화해가는 품종이다. 부르봉 품종이 심어져 그 섬의 이름을 가진 또 하나의 훌륭한 커피가 있다.
1502년 5월 21일 포루투갈의 해군 사령관 주앙 다 노바 (João da Nova)는 남대서양 한 가운데 섬 하나를 발견한다. 그 날은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어머니 세인트 헬레나의 축일이었기에 그 섬의 이름을 세인트 헬레나라 지었다. 콘스타티누스 이름을 딴 콘스탄티노플이란 지명이 이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로만 카톨릭에서 세인트 헬레나의 축일은 8월 18일) 하지만 포루투갈은 이 섬 역시 점유하지 않았다. 단지 유럽을 오갈 때 보급기지와 먼 항해길에 쉼터로만 사용했다.
1584년엔 일본으로 구텐베르크 인쇄기를 최초로 들여온 덴쇼 소년사절단(天正遣欧少年使節 덴쇼 겐오 쇼넨시세쓰)이 유럽으로 가는 길에 잠깐 들러 쉬어가기도 했다.
무인도였던 이 섬이 절실히 필요했던 영국 동인도 회사는 국가에 행정권을 요청하고 1657년 올리버 크롬웰 장군은 이를 인정해주었다. 이로써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이 섬을 요새화하기 위한 식민지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1733년 세인트 헬레나에 영국 동인도 회사의 캡틴 필립스(Captain Philips)가 이끄는 하우톤(Houghton)호가 도착한다. 하우톤호에는 모카항에서 직접 가지고 온 커피 씨앗이 있었고 씨앗은 섬의 뱀부햇지(Bamboo Hedge)라는 지역에 심어졌다. 이 때 심어진 커피는 부르봉 종(Green Tipped Bourbon)으로 변함없이 그 자리(샌디베이 농원)를 지키며 특유의 원형을 유지한 채 다른 곳으로 퍼지지 않고 세인트 헬레나에서만 자라났다.
바람만이 불어오는 화산암으로 둘러싸인 이 섬에 1815년 유럽을 호령하던 키 작은 한 사람이 도착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éon Bonaparte)
지중해 코르시카 섬 출신으로 프랑스 황재까지 올라갔던 그는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의 웰링턴 장군에게 패한 후 세인트 헬레나 섬에 죄수의 몸으로 유배를 왔다. 나폴레옹이 이 섬까지 온 이유는 유배지 엘바에서 탈출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 섬은 탈출이 불가능한 섬인데다가 유럽 연합군 2000여명이 섬 주위를 계속해서 순찰했다고 한다.
화려한 황제로 전 프랑스 국민으로 부터 숭앙받았던 나폴레옹의 섬에서의 삶은 그야 말로 비참했다. 축사로 사용되었던 초라하고 쾌쾌한 목재 건물 롱우드 저택에서 불편하게 생활하며 과거 자신의 전투와 정치를 회고하고 글을 썼다한다.
유럽에서 일어나던 모든 무역을 봉쇄하고 커피 무역마저 옥죄어 본의아니게 대용커피의 성장을 이끈 그가 세인트 헬레나에서 즐겨마셨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곳에서 나는 브루봉 커피였다고 한다. 1822년 5월 5일 유럽을 재패하고 세계를 호령하던 나폴레옹은 롱우드 저택에서 가뿐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으로 찾았던 것도 이 섬의 커피라 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éon Bonaparte)
세인트 헬레나 커피는 시대를 호령하던 황제의 죽음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되었고, 현재는 세계 최고급 커피의 한 종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