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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코치 Nov 25. 2020

그들은 당신의 범죄경력을 알고 있다.

불굴의 보이스피싱


그날은 일이 많았다.


 아침부터 급한 일이 생겨 정신없이 처리하느라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확인하고 지시하고 조치하고 보고하고, 전화만 100통을 넘게 했다. 정확히 세어보니 104통이다. 1년에 한두 번 있는, 그런 정신없는 날이었다.  


의문의 전화


 그렇게 열심히 상황을 처리하고, 일이 마무리되어 갈 때쯤 02-530-xxxx 번호로 전화가 왔다. 안 받을까 하다가 지금 처리 중인 일과 연관된 전화일 수도 있을 것 같아 받았다. 웬 여자였다.


'서울 중앙지검입니다'


 어라? 지금 처리하고 있는 상황이 우리부대와 일반인들 사이의 법적 문제에 관한 일이었다. 이걸 벌써 서울 중앙지검에서 알고 물어보는 건가? 연관된 일반인들이 서울중앙지검에 아는 사람이 있어 진행상황을 물어보려 나에게 전화하게 한 건가? 복잡한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무슨 일이시죠?'


'지금 지명 수배돼있는 거 아시죠?'


 에라이.

 그냥 끊을까 하다 무슨 소리 하는 거냐고 물어봤다.


'벌금 안 낸 거 아시죠? 그것 때문에 지금 지명 수배되셨어요. 우편으로 보내드렸는데 못 받으셨나 보네요. 지금 선생님 명의로 된 검찰청 가상계좌 불러드릴 테니 빨리 입금하셔야 지명수배 풀려요'


 듣다 보니 점점 가관이다. 근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도 듣고 있자니,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벌금형 받은 사실이 없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이 모래알만큼 아주 조금 피어올랐지만, 만약 최근 벌금형을 받은 적 있는 사람이라면 당황스러울 법도 했다.


이 인간들이 내 정보를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궁금해서, 누구한테 전화한 거냐고 물어봤다.

‘황00씨 아니세요?’


뭐지. 난 황씨가 아니다. 아닌데요?


‘010-6xxx-xxxx 아니세요?’ 내 전화번호가 아니었다. 아닌데요?


‘죄송합니다’ 하고 끊었다.(아, 욕 한마디 할 기회도 없이..)  이렇게 멍청한 놈들이 사기를 치고 있다.


사기꾼들의 의도


내 전화번호는 ‘010-9xxx-xxxx’로 사기꾼이 말한 번호와 한자리만 달랐다.


다른 한자리도 6과 9라서 6을 누르려다 아래에 있는 9를 잘못 누른 듯했다. 사기꾼이 다시 6xxx로 전화할 것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6xxx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일이 바빠 잠시 귀찮았지만, 혹시 황00씨가 맞다면 당황하기 전에 내가 알려주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신호가 가고 남자가 전화를 받는다. 황00씨냐고 물었다.


 ‘네 맞는데요’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방금 전화받은 내용을 설명해 주고, 아마 사기꾼들이 전화번호를 잘못 눌러 나한테 전화한 것 같은데, 황00씨에게 다시 전화할 수 있으니 속지 마시라고 일러드렸다. 황00씨는 감사함을 표했고 예측되는 범죄 하나를 예방했다는 뿌듯함을 느끼며 다시 일에 집중했다.


 일을 좀 하다 보니 다시 화가 난다. 천하의 나쁜 놈들이 개인정보를 빼돌려 전화하고 있었고, 실제로 벌금형 처분받은 사람이라면 내밀한 개인 정보인 '벌금형 처분사실'을 알고 있어 당황스러울 테다. 본인 명의로 된 가상계좌를 만들어 입금하라고 독촉해오면 속을 법도 했다. 말투도 어눌하지 않은 토종 한국 사람의 선명한 발음이었다.


 나는 2년 전 사기꾼을 고소해 형사처벌받게 한 적이 있다. 지금 그 사기꾼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 그때 사건진행 기간 중 검찰과 법원에서 고소인인 나에게 02로 된 발신번호로 전화를 걸어왔었다.


 사기꾼들이 발신번호를 조작해 실제 서울중앙지검 전화번호로 전화한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사기꾼이 발신한 번호가 진짜 서울중앙지검이라면 보이스피싱에 악용되고 있다는 점을 알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02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엔 남자가 받는다.


‘서울중앙지검입니다’


역시 내 추론이 맞았나 보다. 제가 방금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았는데요, 이 전화번호로 전화를 하고 있어 알려드리려고요.


‘여기 서울중앙지검 맞는데요? 벌금형 때문에 그러시죠?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아우 씨. 콜백 전화를 받는 사기꾼이었다. 당신 이름은 어떻게 되냐 물으니 알려줄 수 없단다.


 공무원이 전화받으면서 누군지도 안 밝히냐고 누군지 확인해야 내 이름을 말할 거 아니냐 했더니, 보이스피싱에 악용될 수 있어서 알려줄 수 없단다. 별 걱정을 다하는 사기꾼이다.


사기 치지 말고 정당하게 돈 벌라고 말하고 끊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고, 그냥 웃긴 사기꾼 놈들로 잊힐 무렵 그 전화번호로 다시 전화가 왔다.


 아 왜요?

기본 소양이 부족한 자들


‘황00씨, 맞잖아요. 전화번호 6xxx에서 9xxx로 바꾼 거 확인했습니다. 황00씨 지금 벌금이 어쩌고 지명수배가 어쩌고..’


 뭐지? 사기꾼들이 나를 황00로 확신하고 있다. 코너에 몰았다는 듯이 윽박지르고 있다. 머리를 굴려봤다. 왜 나를 황00씨로 확신하고 있을까?


 아마 황00씨가 사기꾼 전화를 받고 자신이 황00가 아니며 최근에 전화번호를 바꿨다고 했나 보다. 이분도 참 신박하신 분이다. 그냥 끊어도 될 것을 굳이..


사기꾼은 확신에 차서 나를 몰아붙였다. 그래 내가 잠시 황씨가 되어보자. 사기꾼의 말을 다 듣고 벌금을 왜 검찰에서 내라고 하는지 물어봤다.


‘여긴 집행과이고 법원 지시로 벌금 처리하고 있습니다’

 검찰이 벌금을 왜 처리하고 있냐고 물으니 안내면 지명수배해 잡으러 가기 위해서란다. 그래서 내가(아니 황씨가) 지명수배된 것이다.


 좋다 만나자. 지명수배라며? 나 잡으러 올 필요 없이 나랑 만나자 했다. 서울중앙지검으로 오란다.

가면 너 거기 없을 거잖아. 지명수배자 잡으면 실적이 클 텐데, 최소한의 노력은 해야지 않을까?


중간에서 만나자고 하니 바빠서 못 나간다고 중앙지검으로 오란다. 양심도 없다. 하긴 사기꾼이 양심이 있을 리가. 먼 거리의 두 사람이 만나는데 중간이 아니라 본인한테 오라니, 기본 소양이 부족한 사기꾼이다.


 내가 잡으러 가는 사람인지 니가 잡으러 와야 하는 사람인지. 누가 누굴 잡는 걸까. 검찰인데 지명수배자 잡기는 싫고 돈만 받고 싶은가 보다.


안 낸 벌금이 얼마냐고 물었다. 90만원이란다. 쪼잔하다. 90만원 안 냈다고 지금 지명수배 한 거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주차위반 단속되었다고 면허 취소하는 격이다. 수업시간에 졸았다고 퇴학시킬 기세다.


불굴의 의지, 성공의 조건은 갖춘 사기꾼


 사기 치지 말고 일해서 돈 벌어라. 이걸 속는 사람이 있냐. 나쁜 짓 하지 마라. 나중에 벌 받는다.


 사기꾼이 욕을 하거나, 전화를 끊거나, 적어도 물러설 줄 알았는데 사기꾼 치고 참 의지가 곧았다. 끝까지 존댓말로 맞다고 우기며 벌금 내라고 한다. 엔젤라 더크워스가 ‘그릿’이라는 책에서 말한 '강력한 의지와 지속하는 끈기'를 갖고 있었다.(성공할 조건을 갖춘 사기꾼이다!)


 더 얘기해봤자 같은 말들만 반복되기에 정신 차리라고 말하고는 끊었다. 일을 정리하고 퇴근하려 짐을 챙기는데 문자가 왔다.


계좌명에 검찰청. 디테일


 사기꾼이지만 끈기는 인정한다. 그렇게 면박당하고도 문자를 보내다니. 마지막엔 내가 황00가 아니라고 말해줄 걸 그랬나. 평생 날 황00씨로 알고 있겠지?


사기꾼이 말한 계좌가 진짜 있는지 확인해봤다.


나름 1금융권


 진짜 있다. 거기다 신한은행이다. 법원과 검찰청 청사에는 대부분 신한은행이 입점해있다는 것을 고려한 디테일이다.


 황00 이름으로 계좌까지 만들었으니 그렇게 무시와 면박을 당하고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나 보다. 역시 노력과 자원이 투입되면 자연스럽게 끈기가 생기는 법이다. 만든 계좌가 아까워서 쉽게 포기하지 못한 것이었다.(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면 시간과 돈을 들여라, 강력한 의지가 돋아날 것이다)


 은행에서 검찰청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가상계좌를 만들어준 것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다.


여전히 활개 치고 있는 범죄자들


 보이스피싱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건 꽤 오래전이다. 여러 형태로 진화했지만, 여전히 고전적 보이스피싱이 활개를 친다. 이번에 나에게 전화한 일당은 어떤 부정한 수단으로 타인의 범죄경력을 확보해 벌금을 편취하려는 신종 설계로 보인다.


수사기법과 기술의 발달로 사기꾼들이 많이 잡히길 바란다. 신속한 검거와 강한 처벌로 남의 피와 눈물로 지신의 배를 채우려는 시도가 실익이 없어지길 기대한다.




사건을 돌아보며 정리하다 보니, 당시엔 의문스러웠던 부분들이 퍼즐 조각처럼 맞춰진다.


1. 사기꾼들이 그토록 집념과 끈기를 보인 이유는 뭘까?

  - 먼저 황00의 이름으로 가상계좌를 만들었다. 이를 위해 시간과 자원이 투입되었을 것이다.

  - 이 계좌는 황00를 속이는 데에만 사용할 수 있다. 황00가 아니면 이 계좌를 만든 노력이 물거품 된다.

  - 그렇다면, 황00가 서울중앙지검에서 조사를 받고 벌금 90만원을 처분받은 건 사실인 듯했다.

  - 그 정도 확신이 있으니 이름을 넣은 가상계좌까지 만들지 않았을까?

  - 아하, 그래서 벌금을 높게 부르지 못하고 90만원이라고 했나 보다. 실제 황00가 받은 벌금액수만큼만.

  - 그렇다면 사기꾼들은 검찰청에서 벌금 처분한 자료들을 확보한 것일 테다.

  - 사기꾼들은 황00 뿐만 아니라 서울중앙지검에서 벌금 처분받은 여러명에게 전화를 걸고 있을 것이다.

  - 그중 한 명이 보이스피싱으로 경찰에 신고한다면 사기꾼들이 만든 모든 가상계좌가 정지될 테니,

  - 결국 사기꾼에겐 사기행각에 시간제한이 걸려있는 형국이다. '지금 바로', '이 사람'을 속여야 한다.

  - 그래서 집요하게 집착했나 보다. 내가 황00인줄 알고.


2. 황00의 입장이 되어보자.   

   - 최근 서울중앙지검에서 조사받고 벌금 90만원을 처분받은 사실이 있다.

   - 아직 벌금을 납부하지 않았다.  

   - 검찰 조사받을 때 일정 협의를 위해 서울중앙지검에서 걸려왔던 전화번호와 비슷한 번호로 전화가 왔다.

   - 죄명과 벌금 처분받은 사실, 구체적은 금액, 그리고 아직 납부하지 않은 것 까지 알고 있다.

   - 법원에 입점한 신한은행에 내 이름과 검찰청 명의가 들어간 가상계좌까지 개설되어 있다.

   - 지명수배 되었다니 당황스럽다. 어차피 내야 할 벌금 빨리 내고 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3. 얼마나 속았을까?

   - 복기해보니, 디테일하고 치밀한 설계였다. 사기꾼들에게 돈을 보낸 사람이 꽤 있을 법하다.

   - 사기꾼들의 전화를 받은 사람 대부분은 위축된 목소리였을 테다.

   - 벌금 처분받은 게 사실이고, 아직 납부하지 않았으니.

   - 나처럼 당당하게 사기 치지 말라고, 헛소리 취급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 좀 심했나 싶었는데, 쌤통이다.  




 사기꾼들은 R&D(연구개발)를 목숨걸고 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수법을 여전히 개발해내고 있다. '요즘 누가 보이스피싱 당하나?'하는 생각은 오산이다. 피해액은 매년 규모가 더 커지고 있다.


 이번 경험으로 그 치밀함에 다시 한번 놀랐다. 부디 항상 경각심을 유지해 소중한 자산을 잃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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