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소송 경험기
일반인에게 법원은 친숙한 공간이 아니다. 나 또한 지금까지 개인적인 일로 송사에 휘말린 적은 없었다. 그런데 운전을 하다 일어난 일로 보험사로부터 민사소송을 당했다. 내용을 살펴본 후 부당하다고 생각되었지만, 큰 금액이 아니기에 포기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더러워서 피했다고 자기 위안을 삼아도 될 만했다. 몇 번의 고민을 거듭하다, 대기업과 이를 대행하는 법무법인의 횡포를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법적 판단을 받아보기로 마음먹었고, 승부를 알 수 없는 다툼이 시작되었다.
고수의 싸움법
고수는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겨놓고 싸운다. 이겨 놓지 않았다면 섣불리 싸움에 뛰어들지 않고 압도적 우위를 달성할 때까지 기량을 갈고닦으며 결전의 날을 기다린다. 싸움은 승부를 가르기 위한 혈투가 아니라 상대가 자신에게 승산이 없음을 깨닫게 하는 과정이다. 의욕을 상실한 상대가 무너지기 직전, 가용한 수준에서 넉넉히 아량을 베풀어 상대와 내가 모두 만족하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GG를 받아야 서로가 개운하다.
나도 고수의 싸움을 하고 싶지만, 매번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승산이 별로 없더라도 세밀한 전술로 돌파해야 할 때도 있다. 지금이 그런 경우다. 나는 상대보다 지식과 경험, 규모, 가용시간, 재정, 지리적 측면에서 모두 열세다. 검을 든 상대의 무력시위 앞에 군량을 그저 내어주는 것보단, 단도로 상대의 검에 난 실금을 찔러볼 작정이다. 실패하면 단도도 부서지고 빼앗기는 군량은 더 많아질 터라 정신을 가다듬었다.
업무적으로 법적 문제를 자주 다루고 있음에도, 나에게 당면한 법적 시비의 압박감은 남의 일을 대할 때와는 그 결이 달랐고 많은 스트레스를 불러왔다. 그럼에도, 부당함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고, 잘못된 관행에 정타까진 못 먹이더라도 잽 정도는 날리고 싶었다. 나 홀로 골리앗과 싸운 기록이,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록을 남긴다.
사건의 발단
그날은 아버님께 차를 빌렸다. 시골에서 수도권까지 운전해서 다녀오면 체력 소모는 물론이고 시간적 낭비도 심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책을 보거나 쉬는 것이 훨씬 편했기에 자주 이용했는데, 기차를 타고 가면 발생하는 딱 하나의 문제는 올라가서 차가 없다는 점이다. 어린아이들만 셋이라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택시도 5명은 잘 태워주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도보권 주변 시설들을 이용하였고, 차를 꼭 타야 하는 일이 있을 때에는 시골에서 차를 몰고 올라갔다.
그날은 아내의 사촌 집에 놀러 가는 날이었는데, 부모님께서 버스를 대절해 단체로 여행을 가시기에 차를 빌려주셨다. 아버님의 차를 몰고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불안한 감이 느껴졌다. 차의 제동감이 내 차의 그것과 달랐다. 브레이크 페달을 이 정도 밟으면 이만큼 감속되어야 하는데 그 느낌이 다름을 감지했고,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에 평소보다 여유 있게 앞차와 안전거리 두었다.
그렇게 터널을 지날 때, 앞에서 차들이 급정거했다. 나는 앞차와 100m 이상 안전거리를 두고 있었기에 천천히 감속해나갔는데, 앞차의 앞차들은 급감속 이후 다시 증속을 하고 있었고, 앞차도 앞차의 앞차를 따라 증속 할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앞차는 앞차의 앞차를 따르지 않고 급감속을 이어나가 급기야 터널 안에서 정차해버렸다. 거리가 좁혀짐을 느낀 나는 급정거를 했지만, 미처 완전히 멈추지 못하고 앞차의 뒤를 충격했다. 제동거리를 정확하게 계산하지 못했으며, 예측 운전으로 충분한 안전거리를 확보하지 못하고 후방에서 충격한 나의 잘못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마라
비상등을 켜고 차에서 내려 앞차로 다가가니 여성 운전자와 조수석의 남편이 내렸고, 뒷좌석에는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타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는 운전자에게 괜찮냐고 물으며, 내가 뒤에서 충격했기에 과실을 인정하고 피해에 대한 보상을 해드리겠다고 했다. 차의 상태를 관찰했는데, 외관상 이상은 없었다. 아버님 차 앞 번호판의 볼트가 앞차 뒤 범퍼에 굴곡을 남긴 정도였다. 연락처를 건네주고 서로 갈 길을 다시 향했다.
평소 아버님 차를 빌리면 단기 보험을 가입했었는데, 이번엔 깜박하고 하지 않았다. 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다면 먼저 현금을 제안해 합의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상대방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량 파손은 없는 것으로 서로 확인했고, 탑승하신 분들도 다치시지는 않은 거라면 합의금을 드릴 테니 종결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상대방은 머뭇거리며 잠시 고민하더니 좀 더 알아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한다. 감이 좋지 않다.
다음날 상대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대인 대물 보험접수를 요구했다.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차량 수리비도 그렇고, 병원까지 다니면 금액이 커질 텐데, 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는 나로서는 모두 나의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금액이었다.
아버님의 보험사에 문의해 약관상 책임보험에 가입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운전자가 차를 몰았을 때 발생한 인적 피해에 대해서는 피해자의 부상 정도에 따라 일정 금액이 지급되었다. 물적 피해에는 책임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물적 피해 부분은 모두 내가 부담해야 했다.
전략을 세웠다. 그렇게 악한 사람은 많지 않다고 최면을 걸었다. 상대에게 전화해 내 상황을 설명했다. '아버님 차이고, 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다.'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내 알 바 아니라는 식이었다. 차량은 본사 수리센터로 입고해 범퍼 교환할 예정이며 가족 모두 병원 진료를 받겠다고 한다.
계획은 항상 틀어지는 법이다. 전략을 변경했다. 차량 범퍼는 큰 이상이 없을 텐데 교환하는 것보다 일정 금액을 받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제안했고, 그 돈을 받으면 어느 정도 보상이 되니 병원 치료는 간단하게 받고 보험사로부터 적정한 합의금을 받아 종결해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상대는 ‘나도 사고 내서 호되게 당해봤다. 내가 왜 그런 배려를 해줘야 하느냐. 보험회사 다니는 친구에게 물어보니 내 보험으로 편하게 처리할 수 있다고 한다. 내 보험에 무보험차 사고로 접수해 물적 인적 피해를 다 보상받으면 내 보험사에게 그쪽 보험사로 청구한다고 하니 그렇게 하겠다’는 취지였다.
어떤 상황에서든 포기하면 안 된다. 그 상황에 맞는 최선책을 찾아내야 한다. 나는 상대에게 제안했다. 차량 수리에 실익이 없지 않느냐, 수리할 것도 없는데 현금으로 일부를 주겠다 했다. 그랬더니 50만원을 달라고 한다. 나쁜 놈들. 좋다 50만원을 줄 테니, 병원비로 많은 금액을 지출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책임보험의 한도를 넘는 병원비는 나에게 청구될 수 있기에, 불필요한 병원 진료를 줄이고 상대가 보험사로부터 합의금을 빨리 받아 종결되기를 바랐다. 병원비 증가가 나에겐 가장 큰 리스크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수익률
그렇게 50만원을 건네주고, 시간은 흘러갔다. 나쁜 놈들에 대한 분노도 잊힐 무렵, 아버님 보험사에서 전화가 왔다. 상대 보험사에서 무보험 처리한 후 아버님 보험사에 비용을 청구했고, 아버님 보험사에서는 부상 정도에 따른 한도를 모두 지급했다는 내용이었다. 즉, 본인들은 보상이 끝났으니, 상대 보험사에서 더 청구할 금액이 있으면 나에게 연락이 올 거라고 한다. 책임보험으로 얼마나 지급했냐 물으니, 셋 다 뇌진탕 의증 진단을 받아 개인당 160만원씩 지급해 줬다고 한다.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시행령 [별표1]에 상해의 구분과 책임보험의 한도 금액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다. 뇌진탕은 상해등급이 11등급으로 분류되고, 책임보험 한도 금액은 160만원이다. 아버님 보험사에서는 상대가 뇌진탕 의증 진단서를 제출했기에 11등급으로 분류해 160만원까지만 지급했다. 그 이상 금액은 상대 보험사가 아버님 보험사로부터 받을 수 없었고, 나와 아버님을 상대로 청구할 수 있는 것이다.
상대는 뒤 범퍼가 파손되지도 않은 사고로, 나에게 50만원, 아버님 보험사로부터 480만원 도합 500만원이 넘는 돈을 받아 갔다. 이래서 보험 수가가 내려가지 않나 보다. 수익률로 치자면 들어간 돈이 없기에 무한대다. 한몫 두둑이 챙긴 것이다. 이렇게까지 해야 했었나 하는 괘씸함이 피어올랐다. 충분히 챙긴 듯한데, 나에게 더 청구할 금액은 없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시간은 또 흘러가던 어느 날, 법원으로부터 등기가 왔다.
* 2편 보러가기 : 보험회사에서 소송을 걸어왔다.(2_완결) (brunc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