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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코치 Jan 03. 2021

삶에 죽음이 스쳐 지날때

이장하는 날


 삶과 죽음은 맞닿아 있다. 삶이 죽음으로 연결되고, 죽음이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삶 속에서는 죽음이 요원하고 비현실적이지만, 어느 순간 삶에 죽음이 스쳐 지나가면 그제야 피부로 느껴지고 죽음이 삶의 끄트머리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젊음은 죽음과 가장 거리가 먼 단어다. ‘젊은 베르테르의 죽음’은 거리가 먼 두 단어를 연결해 호기심을 자아낸다. 젊을 때는 죽음이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다가 대게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가까운 이의 죽음에 대해 처음 경험하게 된다. 그러다 친구의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비로소 나의 부모님의 삶과 생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해보게 된다.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해본다는 것은 삶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런 연유로 관에 들어가 보거나 유서를 미리 써보며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삶에 중요한 가치를 찾아보는 강의가 유행하기도 했다. 얼마 전 엄마로부터 엄마의 오빠였던,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셔 뵙지 못한 외삼촌의 묘를 이장한다는 말을 들었다. 외삼촌의 딸은 나의 사촌누나이지만 나와는 나이 차이가 꽤 나서, 나와 사촌누나의 나이 차이보다 사촌누나의 쌍둥이 아들딸과 나의 나이가 더 가까웠다.


 사촌누나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렵게 성장했고, 친척들 중 우리 엄마와 가장 가깝게 지냈다. 사는 곳도 멀지 않아 기존의 왕래도 있었던 데다가, 사촌누나의 쌍둥이 중 아들(나의 사촌동생)이 엄마가 사는 곳 근처에서 군 생활을 해 더 가까워졌다. 무엇보다 엄마는 젊은 나이에 떠나신 외삼촌과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사촌누나를 애틋하게 생각했다. 내가 뵙지도 못한 외삼촌을 친근하게 생각할 정도로 이따금씩 추억을 이야기하셨다. 그 마음이 사촌누나에게 전해져 서로를 다른 친척들보다 더 가깝게 여겼다.


 외삼촌의 묘를 이장한다는 사촌누나의 연락을 받고 엄마가 가보신다고 하는데, 이장하는 추모공원이 마침 내가 살고 있는 곳과 멀지 않았기에 엄마를 모시고 같이 가기로 했다. 묘를 이장하는 이유는 기존 묏자리가 해가 들지 않고 경사진 음지에 놓여있어, 추모공원으로 옮겨 편하게 모시기 위함이었다. 묘를 이장하는 경우는 처음 겪어보기에 생소했고, 이런 것도 있구나 정도로 여겼다.


 엄마를 모시고 가며 여쭤보았다. 외삼촌이 언제쯤 돌아가셨지?

 ‘한 40년 됐지.’

 그렇게 오래되었구나. 그때는 돌아가시면 어떻게 연락했대? 전화기도 없었던 거 아닌가?

 ‘당연히 없었지. 그때는 급한 소식이 있으면 전보를 보냈어. 우체부가 배달하는 전보를  받아보는 거지. 일반우편보다는 좀 더 빨리. 전보가 오면 일단 가슴이 철렁해. 급한 소식이니까.’


 그렇다. 좋은 소식은 급한 게 없다. 요즘으로 치면 새벽 3시에 가족으로부터 전화가 오는 느낌 아닐까. 전보 내용은 외삼촌이 교통사고를 당해 위독하다는 내용이었고, 전보라고 해봤자 당일 도착하는 것은 아니기에 외삼촌이 살아 계신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놀란 마음에 다급히 집을 나서 버스를 타고 터미널로 향했는데, 가다 보니 버스비 말고는 챙겨 나온 돈이 없으셨다. 급히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 돈을 챙기고 외삼촌이 계셨던 마산으로 가면서, 제발 살아만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고 한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참 답답할 일이고 마음 졸일 일이다. 아끼는 사람의 생사를 알 수 없이 버스를 타고 만나러 가는 시간이 얼마나 애탈까. 그렇게 마산에 내려 택시를 타고 외삼촌 댁으로 가면서 기도를 이어가는데, 택시 기사가 대통령이 죽었다고 했다. 라디오에서 대통령의 죽음을 알렸다고, 큰일 났다고 하는데 엄마 생각엔 ‘그게 뭐라고, 지금 중요한 건 오빠가 살아있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외삼촌이 돌아가신 해는 1979년이었던 것이 명확해졌다.


 그렇게 마음 졸이며 도착했지만, 외삼촌은 이미 숨을 거둔 지 하루가 지났다고 했다. 그때 사촌누나의 나이는 14살이었다. 친척들이 모여 의논 끝에, 일단 급하니 가매장을 하고 나중에 제대로 된 묏자리로 옮기자는 결론에 달했는데, 속절없이 41년이 지난 것이다. 사촌누나는 아버지의 묏자리가 항상 마음에 걸렸고, 좋은 곳으로 모셔야 한다는 생각만 하다가 드디어 결심하고 날을 잡은 것이다.


 외삼촌이 돌아가신 나이를 가늠해보니 지금 내 나이와 같았다. 멀게만 느껴지던 외삼촌의 삶이 나의 내면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지금 교통사고로 죽는다면 어떨까? 죽는다는 인식도 예고도 없이 생이 끝나버린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아내와 아이들이 눈에 밟혀 얼마나 원통할까, 원혼이 되어서라도 가족들을 보살피고 싶지 않을까.


 또 41년이 지나 딸이 쌍둥이 손자손녀를 데려와 나를 기억해 준다면 얼마나 고마울까. 외삼촌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런 말씀을 하실 듯했다.

 ‘오랜 세월이 지났네. 딸아, 잊지 않고 찾아줘서 고맙다. 사위도 고맙네. 쌍둥이 손주들도 벌써 성인이 되었구나. 직장 다닌다고 바쁠 텐데 먼 길 와줘서 고맙다. 아끼던 내 동생도 같이 왔구나. 조카가 어느덧 그때 내 나이가 되었네. 자네는 가족들과 오순도순 행복하게 잘 지내게.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사촌누나는 마음의 짐을 덜어 홀가분하다고 한다. 엄마는 외삼촌이 편안할 것 같아 좋다고 한다. 나는 이런 기회로 가족과 친척이 모이고, 추억을 보듬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게 어르신들께서 남겨준 유산이라 여겼다. 그리움을 그려보며 그리운 사람들과 그리워질 시간을 그립게 보냈다. 그렇게 이장은 끝났다. 


 돌아 나오는 길에 다른 묘들의 묘비가 눈에 들어온다. 요즘은 묘비에 사진을  넣어 주기도 하나보다. 숱한 사람들의 숱한 사연이 곳곳에 내려앉아 있었다. 훑어보다 시선이 멈췄다. 1995-2015.

 무슨 사연일까. 가족들은 얼마나 슬펐으며, 또 아픔을 지니고 살까. 가슴이 먹먹해진다. 생각에 잠기며 발길을 옮기는데 다시 숫자가 눈에 들어온다.


 2016-2020. 발걸음이 멈췄다. 그 자리에 서 버렸다.


 아까의 먹먹했던 가슴이 이제는 바닥에 내려앉았다.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나. 저마다의 아픔이 있고, 내가 접하지 못한, 접할 수 없는 슬픔도 많다. 주변 사람들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다투고 화내고 갈등을 일으켰던 순간들이 다 부질없다. 더 웃고, 더 행복하게 지내고 싶다.


 삶에 죽음이 스쳐 지나가면 인생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다. 현실 너머에서 현실을 굽어보게 된다. 엄마 따라나섰던 추모공원에서 삶과 연결되어 있는 죽음을 둘러보았다. 죽음이 삶의 이면이 아니라 삶과 연결되어 있음을 온전히 이해했다. 소중한 것들을 더없이 아끼고 보듬자. 어루만지자.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말자. 내 나이에 떠나간 외삼촌이 하고 싶었을 일들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자. 외삼촌이 41년의 세월을 건너 전해주신 깨달음을 간직하고, 후회하지 않도록 노력하자.




 하루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이들이 커가는 기쁨과 아쉬움을 즐겨야겠다고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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