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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코치 Jan 15. 2021

그림 잘 그리는 아이와, 못 그리는 아빠가 만날 때

 나는 그림을 못 그린다. 이렇게 못 그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못 그린다. 그림 실력은 초등학교 수준에서 멈춘 듯하다. 못하니 안 하게 되고, 더 못하게 되었다. 학교 다닐 때에도 미술은 수우미양가 중 미를 넘어본 기억이 없다. 수우미양가.. 정답다


 첫째는 어려서부터 글과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 세 살 무렵 자기 이름을 써달라고 하더니 곧잘 따라 쓰며(그리며) 이름을 외웠고, 엄마, 아빠, 동생,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이모, 친구들 이름까지 쓰고(따라 그리고) 외웠다. 잘한다고 칭찬하고 기운을 북돋아 주니 더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그 이후부터 8살이 된 지금까지 매일이 그림이다.  


창작의 고통



 모든 부모는 자기 아이가 천재인 줄 아는 시점이 있다고 한다. 그런 점을 고려해 보수적으로 보더라도, 그림에 재능이 있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내가 몇 번 ‘메이(첫째 별칭)는 그림 진짜 잘 그린다. 아빠보다 더 잘 그리는 것 같아’라고 이야기했더니, 어느 날 메이가 나에게 도전을 신청했다.


 "아빠 나랑 그림 대결하자."


 다섯 살 아이에게 그림 대결 일기토를 받고 잠시 긴장했지만 의연히 수용했다. 그래 해보자. 아무리 내가 못 그리기로서니, 초등학교 수준은 되지 않겠는가. ‘아빠가 그림이나 음악을 못 배워봐서 그래’라는 짠내 나는 밑밥도 깔아줬다.


왼편이 나, 진 것 같다. vs는 어디서 배운거지?


 그렇게 아이와 그림 대결을 즐기며, 같이 할 수 있는 놀이가 하나 늘었다. 그리고 하나 깨달은 사실. 내가 상상해서 그리는 것들은 정말 못 그리지만, 눈앞에 있는 그림이나 물체를 보고 따라 그리는 건 어느 정도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오른편이 나, 내가 그린 유니콘 보고 내가 놀란 날



 그리고 사람은 정말 못 그린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열심히 그려도 괴물이나 좀비가 되었다. 오히려 열심히 그리려고 할수록 기괴해져 갔다. 아내를 그려줬다. 아내는 처음엔 웃다가 심화되는 기괴함을 보고 결국은 얼굴을 붉혔다.



핸드폰 보는 아내



핸드폰 보는 아내 2, 왼편이 나, 오른편이 메이



 억울했다. 정말 잘 그리고 싶은 마음으로 그렸고, 심혈을 기울였다. 일부러 못 그렸다고 생각하는 아내가 원망스러웠다. 최선을 다했는데. 화내는 아내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아내는 그림을 그려 복수했다.



아내가 그린 아내를 그리고 있는 나


 뭐, 나쁘진 않았다. 기괴스러움이 나를 능가할 순 없어 보였다. 역시 자연스러운 것이 최고다.


 메이는 그림에 대한 열정이 점점 깊어져, 시간만 나면 그림을 그렸다. 일어나면 그림, 밥 먹고 그림, 간식 먹고 그림, 자기 전에도 그림, 그림그림그리...


 라이벌(?)로서 메이의 향상되는 그림 실력을 보고 있자니, 여유 있게 조깅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전력 질주로 따라오는 기분이다. 발소리가 커지고 점점 거리가 좁혀짐이 느껴진다.


 메이가 일곱 살이 되고 나서 대결을 할 때면,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그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림을 잘 그리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져보았고,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얼마 전 메이가 나에게 그림 대결을 신청했다. 요즘 부쩍 만화 캐릭터의 디테일과 수채화 수준이 높아짐을 느껴 살짝 긴장되었지만 태연하게 대답했다. '좋아 드루와.'


 ‘아빠 나는 왼손으로 그릴께’ 메이의 말에 폭소가 터졌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왼손은 아직 좀 아니잖아? 들어보니 요즘 엄마가 왼손으로도 그려보라 해서 연습 중이었나 보다. 아직은 오른손으로 상대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그림 대결의 막이 올랐고, 심혈을 기울인 나의 그림은 언제나 그렇듯 (공정성은 1도 없는) 가족 투표 순위에서 밀려 패배의 쓴 잔을 들이켰다.



왼편이 나, 실력이 늘었나?


 조금 있으면 공정성을 소환하더라도 박빙의 수준이 될 듯하다. 사실 나는 내가 잘하는(?) 따라 그리기로 대결 종목을 정하고 있다. 메이의 주 종목인 캐릭터나 인형, 사람(특히 여자) 그리기라면 내가 열세일 것이다. 좀 치사하지만 경합을 통한 발전을 위해 당분간 따라 그리기로 종목을 고정하려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다 보면 재미있는 일들이 있다. 메이의 도전으로 뒤늦게 그림 그리는 재미를 느끼고 있다. 생각보다 잘 그리는 나를 보고 나 혼자(정말 나 혼자) 놀라곤 한다. 심지어 조금씩 느는 것 같다. 좀 더 잘 그리고 싶다는 마음도 생긴다. 내가 그림에 흥미를 느끼게 될 줄이야.


 그림을 통해 메이와 함께하는 놀이가 생겼다. 옆에 붙어 앉아 펜을 굴리고 있자니 친구가 된 기분이다. 수준도 비슷하다. 아이와 웃으며 놀고, 선의의 경쟁을 통해 발전해 나간다면 이보다 더 좋은 놀이가 어디 있을까.


 그림 잘 그리는 첫째 덕에 뒤늦게 그리는 재미를 알아가는 요즘이다.


 



메이가 엄마랑 떨어지는 게 싫어 학원에는 절대 안 갈 거라고 하던데, 이참에 핑계 대고 메이랑 같이 동네 미술학원 가서 배워볼까. 같이 유치원 반에 들어가면 딱일 듯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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