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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코치 Jan 18. 2021

아이에게 화내는 나를 돌아보며


 나는 화를 잘 내지 않는 편이다.(내 생각엔 그렇다) 화가 날 일이 있어도 한 번은 참으려고 하고, ‘화내서 나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라는 글귀를 노트북 메인화면에 써놓기도 했다.


 하지만 운전할 때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 생겼을 때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지 못한 적도 있다. 나이가 들면서 화내는 일이 더 줄어드는 것 같지만, 아직도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화를 내서 안 그래도 풀기 어려운 실타래를 더 꼬이게 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심신을 갈고닦는다.


 아이들을 키우며 화내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수없이 한다. 돌이켜보면 아이임을 충분히 배려해주지 않아 화가 난 적도 많았던 것 같다. 사소한 일에 화냈다가,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게 뭐라고 아이가 소중하지, 별것 아닌 것에 화내지 말자는 반성을 하며 화낼 일을 하나씩 줄여나간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화날 일이 별로 없다. 아이가 그릇을 깨도 아이니까 깨는 거지 다치지 않았으면 다행이고, 다음부터는 안 깨지는 것을 주거나 깨지는 물건은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둬야겠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물건을 잃어버려도 그럴 수도 있지, 소중한 물건이면 잘 챙기라고 이야기해 주고 잃어버리면 안 되는 물건은 내가 직접 챙긴다.


 아이가 밥을 먹지 않아도 입맛이 없을 수도 있지, 대신 간식은 주지 못하니 배가 고프면 이야기하라고 말해준다. 억지로 먹여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집착하면 더 싫어지는 법이다.


 안 먹는 반찬이 있어도 억지로 먹으라고 하지 않는다. 때가 되면 먹을 것이라 기대하고, 뭐 안 먹어도 그만이다. 그게 뭐라고. 고통스러운 식사를 할 필요는 없다. 밥 먹으며 아이와 씨름하고, 기분 상하는 것보다 기분 좋게 다른 음식들을 잘 먹는 게 서로의 행복에 보다 도움이 된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아이의 ‘아빠 싫어’ 란 말에도 상처 받지 않는다. 아빠가 싫을 수도 있지 뭐. 나는 그래도 너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해 준다. 내가 진심을 다한다면 언젠가 알아줄 것이라 생각한다. 알아주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않으려 한다.


 아이 셋을 키우며 어느 정도 달관의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자인 첫째와 막내에게는 좀 더 너그럽지만, 남자인 둘째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기준으로 삼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똑같이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려도 딸들에게는 조금 더 여유를 두고 지켜보는 반면, 아들에게는 오래 참지 못하고 엄하게 꾸짖는다.


 장난감을 가지고 싸워도 아들에게는 좀 더 양보할 것을 요구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놀이나 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은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마음이 불편하다. 좀 더 적극적이었으면 하며 답답한 마음이 든다. 꾸짖는 방법도 다르다. 딸들에게는 부드럽게 말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아들에게는 화난 어조가 더 많이 나온다. 꿀밤을 한 대 때리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딸들에게는 들지 않았던 생각들이다. 아들에게만 더 엄격한 나의 내면을 인지하는 순간 흠칫 놀라곤 한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들은 좀 더 어른스럽고 의젓하기를 바라는 것일까? 무의식 중에 아들에게 사회적 성 역할로서의 남자다움을 기대하는 것일까? 배움이나 발달이 또래들에 비해 빠르지 않은 아들을 내심 못마땅해하고 있는 것일까? 잠재의식 속에 숨어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작용하여 나도 모르게 아들에게 돌려주고 있는 것일까? 명확하게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딸을 대할 때와 아들을 대할 때 같지 않은 내 모습이 있다는 점이다.


 해서 다짐하고자 한다. 아들에게 화내지 않겠다. 자기반성이자 나에게 공표하는 자기 선언이다. 화를 내지 않겠다는 다짐을 기억하려 한다. 무의식의 발현을 의식적으로 통제해보려 한다. 소아정신과 의사인 노경선 작가는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라는 저서에서 "아이에게는 부모가 세상의 전부이자 성격과 기질의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절대적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아이 입장에서 세상의 전부인 엄마아빠가 나에게 화를 내면 얼마나 절망스럽겠는가. 사랑을 빙자한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현명한 방법으로 해야 할 것과 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구분하도록 알려주고 싶다. 멱살을 잡고 끌지 않고 자연스럽게 따라오도록 환경을 만들려 한다.


 마지막으로, 화를 냈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자책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신도 아니고 성인군자도 아니다. 감정을 조절 못 할 수도 있다. 화를 내지 않으려고 다짐하고, 노력할 것이지만 화를 냈다고 해서 자기 경멸로 빠지지 않으려 한다. 화를 내게 된 이유를 분석하고 다시 그러지 않도록 고쳐나가려 한다. 실패가 두려워 도전하지 않기보다는,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완성도를 높여 나가는 것이 목표다.


 이 글을 아내도 보고 있다. ‘말은 그렇게 해놓고 지키지도 못하냐’는 비난이 두렵기도 하다. 한편으론 ‘내가 이렇게 기특한 생각을 다 했어. 우리 같이 화내지 않도록 노력하자’는 유인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아내가 아이들에게 화를 그렇게 막 아주 많이 내고 있다는 건 아니다. 오해하지 마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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