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메이(첫째의 별칭)가 엄마아빠의 나이를 궁금해하더니,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삼촌의 나이를 물었다. 10 이상의 수는 모두 ‘엄청 큰 수’의 범주에 속함에도 주변인들의 나이를 모두 외울 심산인지 나이에 대한 궁금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곤 조금 더 발전해 ‘내가 몇 살 되면 엄마 아빠는 몇 살이야?’로 이어졌다. ‘내가 20살이면 아빠는 몇 살이야?’ 아빠는 50살이지~ ‘으악 나이 너무 많아’ 이런 식이다.
그날은 할머니 집에 놀러 간 날이었다. 할머니는 네 자녀를 두셨고 그중 아빠가 막내라, 이미 칠순을 넘으신지 꽤 되었다. 아빠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할머니, 엄마와 함께 앉아 있던 메이가 물었다. ‘내가 10살 되면 할머니는 몇 살이야?’ 그때 할머니는 80살이지
‘으악 너무 많아. 내가 50살 되면?’
순간 차 안에 정적이 흘렀다. 누가 먼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멈칫하고 있을 때, 할머니가 대답했다. ‘그땐 할머니가 하늘나라 가있지~’ 메이가 울상이 되었다. ‘아 안돼 나 나이 안 먹을래’ 내가 보탰다. ‘그래 너무 멀리 갔다. 당분간은 20살까지만 하자~’
시간이 지나고도 그 상황이 한동안 그려졌다. 메이의 질문 하나가 할머니의 꽤 많은 연세를표면화시켰다. 내 마음속에 우리 엄마는 여전히 젊고 활력이 넘치는데, 사실은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리 꼿꼿하게 펴시고 머리도 정갈하게 갈색으로 염색하고 계시다 보니 연세를 잊고 있었다. 현대 과학에 힘입은 평균 수명을 고려해봐도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다.
엄마는 네 자녀를 키우면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 배움이 길지 않으셨기에 공부를 곧잘 하는 자녀들이 학비가 없어 교육을 이어나가지 못하는 것을 가장 염려하셨고, 주변분들은 여유를 즐기실 나이에 몸을 혹사해가며 일하셨다. 많지 않은 보수의 한계를 노동의 양으로 보완하려, 3개의 직장을 다니셨다. 낮에 청소일을 하시고, 저녁에 식당에서 주방일을, 새벽엔 목욕탕 청소를 하시며 하루에 잠 2시간도 못 자는 생활을 이어나가셨다.
나는 고3 때에도 공부하는 나보다 엄마가 몇 배는 더 힘들어 보였고, 도저히 게을러질 수 없었다. 고3의 스트레스와 투정은 꼬마 장난이었다. 학비가 지원되고 기숙사, 식비, 교재비, 심지어 품위유지비라고 일정 보수까지 주어지는 사관학교는 나에게 최선의 선택지였다. 말도 안 되는 엄마의 노동과 혹사가 몇 년 더 이어지게 할 순 없었다.
얼마 전 얘기를 나누다, 엄마는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내가 소위로 임관하고 휴가 나와 누나, 엄마와 함께 부산에 놀러 갔을 때라는 말씀을 하셨다. 당시 우리 엄마도 여행 다니고, 바람 쐬고, 콘도에서도 주무셔 봐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에 첫 휴가를 나와 부산으로 여행 갔었다. 그전까진 이렇다 할 여행 한번 가보지 못했던 것이다. 콘도에서 맥주 한잔 하며 앞으로 이런 여행 많이 다니자고 말씀드렸다.
그때 마음속으로 ‘엄마랑 같이 할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건강하고 활기 있으실 때 좋은 곳으로 함께 여행 다니려 마음먹었다.
그로부터 10년이 넘게 흘렀다. 그때 시간이 많지 않다고 ‘느낀’ 정도라면, 이제는 ‘정말’ 시간이 얼마 없다.
기력도 많이 약해지셨고, 계단이나 가파른 곳을 다니기도 쉽지 않다. 얼마 전 누나가 엄마를 모시고 시골로 놀러 와 바닷가 공원에 바람을 쐬러 갔다. 날씨도 좋고 풍광도 좋았다. 구경을 마치고 내려오시던 엄마가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참 좋다. 아들하고 딸하고 좋은 경치 보고 바람 쐬니 행복하네'
그죠? 날씨도 선선하고 경치도 끝내주네요.
'여기를 또 올 일이 있겠나’ 나지막하게 이어진 엄마의 말에 가볍던 발검음이 멈칫했다.
'에이 다음 달이면 또 올 건데 무슨 말씀이세요' 웃어넘겼지만 가슴이 찡했다.
아이들이 시골로 내려오면 자주 놀러 오시라고 말씀드렸는데, 결국 코로나에 발목이 잡혔다. 아이들 보는 걸 그렇게 좋아하시는데, 안타까운 시간만 흘러간다. 많지 않은 엄마의 시간이 알찰 수 있도록, 나중에 뒤돌아 보며 미소 지을 순간이 많아지도록 차분히 준비해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