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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코치 Apr 15. 2021

긍정의 힘, 집 앞에서 세렝게티 체험하기

  해야 할 일들이 많아 시간이 늦었다. 요즘 도통 운동을 못하고 있어, 오늘은 기필코 달리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주섬주섬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밤늦은 시간 시골 도로로 나섰다. 


  도로엔 가로등 하나 없다. 달빛도 구름에 가려 음산한데, 검은색 아스팔트는 거리감마저 앗아가 발바닥이 허공을 딛고 달리는 기분이다. 온몸의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 꽤 가까운 곳에서 선명한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따각따각’


 민감해진 귓가를 자극하는 불길한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입에서 고상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아우. 씨. 깜짝이야.’ 순간 온몸에 힘이 꽉 들어갈 정도로 깜짝 놀랐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흐릿한 전방을 주시한다. 

‘따각, 따각, 따타타타다닥닥’ 걸어가던 무엇인가가 뛰어간다. 도로를 가로지르는 사람만 한 물체의 형상이 신기루처럼 보인다. 노루다. 아니 사슴인가? 생각하는 찰나 자가 복제가 이뤄진 듯 어둑한 그림자가 수십 개로 늘어난다.  


 선두를 따르던 무리들이 떼 지어 달리기 시작한다. 수십 마리 노루가 내 앞을 지나가는 장관이 펼쳐지고, 달리던 나는 멈춰야 할지 더 가속해 밀어붙여야 할지 고민하다 자극하지 않도록 속도를 유지하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다.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저 수십 마리 노루들이 나를 향해 덤벼든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주먹과 발로 대항해야 할지, 보이는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노루 무리들이 길을 다 건너고 20여 미터 떨어진 공터에 멈춰, 달리는 나를 마라톤 대회 구경 나온 동네 주민처럼 지켜보고 있다.  여긴 대한민국인가 세렝게티인가 다들 덩치도 커, 키는 130~50cm, 머리에서 꼬리까지 몸길이도 150cm는 넘어 보인다. 어두운 밤, 시골마을 도로에서 사람 하나와 노루 수십 마리가 그렇게 서로를 보고 놀랐다가 서로에게 안도하고 스쳐 지난다. 

그제야 멧돼지가 아닌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멧돼지 수십 마리가 저 거리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갈 것 같다. 

 

  나는 지금 교육을 받기 위해 몇 달간 처음 생활해보는 곳에 파견 와 있다.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지내려 별거생활을 정리하고 시골로 이사했는데, 나는 교육을 받으러 몇 달간 또 다른 시골에 혼자 온 것이다. 나를 괴롭히려고 일부러 이렇게 교육을 보내나, 전역할 때까지 주거 안정은 희망사항으로만 남겨두라는 무언의 압박인가 싶기도 하다. 교육을 받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성적이 진급에도 영향을 미치고, 끊임없는 과제와 토의로 쉴 새 없이 바쁘게 몰아친다.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 같아 야밤에라도 시간 내 달리기를 한 것이다.

 

  처음에 5km를 달리려고 생각했다. 지형을 잘 모르는 곳인 데다 어둡기까지 하니, 2.5km를 달리고 U턴해 갔던 길을 되돌아 올 계획이었는데, 2.5km쯤 달리다 보니 한 바퀴를 크게 돌아 원점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달리면서 좌회전 우회전 오르막 내리막을 몸에 익히며 크게 한 바퀴를 돌고 원점 어귀에 도달했다 생각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전혀 모르는 곳에 와있었다. 고민되었다. 이미 달린 거리가 5km다. 방향감각을 믿고 주변에서 원점을 찾아볼 것인가, 왔던 길을 돌아갈 것인가.

 

 방향감각으로 원점을 찾아보다간 왔던 길을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방향을 상실할 수도 있다. 달려왔던 5km를 되돌아가는 건 비교적 단순하지만 가장 멀리 돌아가는 방법일 수도 있다. 항상 전화 대기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사라진 교육기간의 해방감을 만끽하고자 핸드폰을 두고 온 것이 화근이었다. 짧게 고민하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로 했다. 방향을 완전히 상실하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이미 5km를 지났기에 헤매다 지쳐버리다면, 몇시간을 걸어가야 할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마법진에 빠진 것처럼 같은 자리를 맴돌지도 모른다.   


  마음을 편히 먹고,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10km 달리기를 안 한지 꽤 오래되었는데 이렇게 한번 해보네'라며 체력을 단련하는 기회로 생각했다. 돌아가는 길에 몇 군데 갈림길에서 잠깐 헷갈리기도 했지만 결국 왔던 길을 차근차근 되돌아 원점에 도착했다. 그렇게 되돌아오던 7km 지점에서 노루 친구들과 대면한 것이다. 집에 와 시계에 기록된 GPS기록을 보니, 5km 구간에서 원점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원점과 꽤 떨어진 곳이었다. 거기서 원점을 찾겠다고 주변을 헤맸다면 완전히 길을 잃었을 듯하다.      


  인생도 그런 것 같다. 가다 보면 뭔가 잡힐 듯, 알 듯 한 순간이 생긴다. 조금만 더 헤매면 요행을 잡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만, 방향을 상실해 일을 망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땐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 새롭게 길을 나서야 한다. 돌아가는 것 같지만 가장 빠르고 명확한 길이다. 가다 보면 노루떼가 지루하지 않게 도와주기도 하고, 뜻밖의 장거리 레이스로 체력을 기를 수도 있을 것이다.  




  좋게 생각하는 방법을 길러나가려 한다. 좋게 생각하다 보니, 나쁜 일이 없다. 잘 풀리지 않거나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아도, 경험이 쌓이고 시행착오를 줄여나가는 기회로 여기려 한다. 일상이 배우는 과정이고 경험을 축적해나가는 기쁨이 있다. 오늘은 또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나를 세렝게티로 데려다 준 노루떼와 간만의 10km 달리기 같은 이벤트를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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