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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코치 Apr 06. 2021

익명으로 쓰면서 발견한 좋은 점들


 나는 익명으로 쓰고 있다.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닉네임을 만들 때 실명과 익명 사이에서 고민은 길지 않았다. 공직에 몸담고 있는 이상 실명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여러 제약이 따른다.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 못할 수도 있고, 가능성이 크진 않지만 주변 동료들이 볼 수 있다 생각하면 편히 쓰지 못할 듯했다.

 

 익명으로 쓰기로 결정한 후, 나를 어디까지 공개해야 할지도 정해야 했다. 해군 장교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임관년도와 병과 정도만 알면 내부에서는 누구인지 쉽게 추측이 된다. 그렇다고 아무런 정보 없이 상황을 설명하고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는 없다. 나의 이야기를 쓰려면 적정한 정보 공개는 불가피하기에, 짧은 고민 끝에 해군, 장교, 소령, 세 자녀를 두고 있다는 정도만 드러내기로 했다. 


 익명을 사용해보니 장점이 여러 가지다. 그중 몇 개를 소개해본다.     


 먼저, 자유롭다. 실명으로 했다면 하지 못할 이야기를 편히 쓸 수 있다. ‘나’라는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군인, 해군, 소령이라는 ‘조직 구성원’으로서 생각을 내보일 수 있다. 실명으로 쓰는 것과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존재한다. 조직 내 일정 직급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특정인의 의견은 조직의 기조와 방향에 부합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지만, 조직 구성원 중 한 명으로서의 의견은 부담이 덜 하다. 소수의 의견도 존중받는 시대이니, 좀 그르거나 올바르지 않아도 큰 부담이 없다. 그렇다고 막 쓰는 건 아니다. 조직 구성원으로서도 자기 검열을 피할 수 없지만, 좀 더 생생하고 선명한 생각을 드러낼 수 있다.

      

 다음으로 솔직해진다. 못난 구석, 고치고 싶은 행동, 버리고 싶은 마음들을 과감하게 쓴다. 좀스럽고 치사한 생각도 쓴다. 실수는 오히려 반갑다. 재미를 주면서 교훈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밝힌다면 쓰기 어려울 것 들이다. 물론 자신의 밝히는 것과 솔직하게 쓰는 것이 양립 불가한 영역은 아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 깜냥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나를 밝히고 치부를 드러내기엔 아직 내공이 딸린다. 결국 익명으로 솔직한 이야기를 쓰고, 쓰다 보니 생각이 정리되고 또 깊어지며 좀 더 나은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활용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객관화시킬 수 있다. 글쓴이와 나를 동일시 여기지 않고, 부캐처럼 생각한다.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부캐를 성장시키는 과정으로 여긴다. 밑도 끝도 없이 홀로 시작한 Lv.0 캐릭터가 고군분투하며 레벨 업하는 과정을 지켜본다. 실패와 부진에도 내상을 입지 않는다. 그러려니, 좋아지겠거니 생각한다. 뭐 안되면 어떤가. 포맷하고 다시 시작해도 되는 것을. 가벼운 마음으로 쓴다. 그래야 글을 낼 수 있다. 나와 글쓴이를 동기화시키면 엄격해진 자기 검열에 글을 내밀기 힘들 것 같다. 익명이 좀 더 다듬고, 좀 더 나은 글을 쓰고자 하는 끝없는 욕망을 누그러뜨린다. 그래서 그나마 띄엄띄엄 글을 낼 수 있다. 작지 않은 이득이다. 

       

 익명으로 쓰다 보니 마음이 편하다. 성장과정을 지켜보는 마음으로 여긴다. 주목받지 못하고 성장이 더뎌도 상처입지 않는다. 내가 익명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아니지. 익명의 장점을 알고 시작한 건 아니니, 정확하게는 익명으로 쓰다 보니 얻은 유익이다.

      

 자산관리나 건강관리 같은 다른 주제로 부캐를 하나 더 만들까 생각하다, 하나라도 잘 하자는 생각에 잠시 미뤄둔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성장시키는 과정이다. 가장 먼저 내가 유익을 얻는다. 글을 보는 사람들도 유익을 얻었으면 하고 기대한다. 누군가에게 웃음을, 공감을, 위로를 주는 글을 쓰고 싶다.

  

 일단 최소한의 성공은 이어가고 있다. 내가 써놓고 내가 보면서 웃고, 공감하고, 위로받고 있다. 내가 쓴 걸 내가 봐도 새로운 건 뭘까? 가끔 감탄도 나온다. 어쩜 이런 생각을 했니? 칭찬도 해준다. 잘하고 있네. 기특하다. 가끔은 자기 독려와 최면도 필요한 법이다.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에 비밀요원이 된 기분도 든다. 이게 나라는 걸 아무도 모르겠지? 이히히.

 

 부캐야, 오늘도 열일하거라. 난 좀 쉴 테니. 다 되면 불러라. 맛있는 거 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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