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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LTNG DWN Oct 09. 2020

기억에 맺힌 영화의 像


본 글은 Magazine Nerd 6호에 기고했으며, 순전한 자기고백의 부끄러운 기록임을 미리 밝힌다.



0. 스물넷의 만우절, 나는 이천 번째 영화와 조우한다. 부스스한 머리를 제대로 감지도 않은 채, 점심을 거르고 본가에서 한 시간 반 남짓 걸리는 모교의 영상 자료실로 향한다. 이미 며칠 전부터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 '욕망(1966)'이 보고 싶었다. 한 손에는 근처 편의점에서 사 반쯤 마신 생수병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너덜 해진 노트를 들고. 항상 앉는 지정석이 있다. VR 1번 좌석. 그저 2인석 소파인데 왜 도대체 그런 명칭이 붙었는지는 사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학생증과 맞바꾼 리모컨과 블루레이를 들고 자리에 앉는다.


아무렇게나 벗은 외투를 빈 자리에 던져놓고, 신발을 벗어 발을 쭉 뻗는다. 휴대폰을 끄고, 헤드셋을 낀다. 긴 머리 때문인지, 이따금 헤드폰 이음새 부분에 머리끝이 낄 때가 있으니 조심한다. 몇 페이지 안 남은 노트를 펼친다. 노트의 겉표지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소설을 오마주 했는지, 어린 소녀가 새끼 돼지를 든 채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극장에 가지 않고 영화를 볼 때 떠오르는 단상들과 궁금한 몇 가지의 질문들을 속기하기 위한 노트지만, 노트 안은 글자인지 아닌지 가끔은 알 수도 없는 빼뚤한 문양들이 너절하다. 어떨 때는 도대체 뭘 쓰고자 했지 하는 표현도 많다. 가령, 졸음과 싸우는 영화를 마주해 끝내 무너진 패잔병의 기록이나, 집중하지 못해 끝나고 뭘 먹을지나 열거한 리스트들. 메신저 백 안에서 굴러다니던 삼색 볼펜을 꺼내고, 색을 바꿔가며, 맨 뒷장에 선을 찍찍 긋는다. 나를 매료시킨 장면 앞에서 스쳐 지나가는 단어를 그깟 볼펜 때문에 놓치는 순간엔 탄식이 절로 나기에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 모두 갖춰졌다고 판단될 때, 왼편의 시계를 한 번 힐끔 본다. 그제야 나는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재생 버튼을 누른다.


나의 기억 속에 맺힌 이천 번째 영화의 상은 여기부터 시작한다. 아니, 여기부터 시작해야 했다. 물론 '욕망'의 영화적 체험은 엄청났다. 테니스와 마임이 나오는 마지막 장면을 보며, 나는 감탄 그 이상의 전율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지만, 두 문단을 읽은 당신은 이미 알 것이다. 이 글은 영화에 대한 비평이 아니다. 도리어 영화라는 하나의 개념화될 수 없는 존재가, 어떻게 나에게 체험되는가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회고다. 이 글에서, 스크린이라는 투영하는 상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존재는 오로지 나의 기억이다. 나를 스쳐 지나갔던 영화들의 편린들을 부끄럽지만 흩뿌려보고자 한다.


1. 유년의 나는 다행히도 VHS 세대의 마지막 황혼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어린 내게 주말은 부모님의 손을 잡고 동네 언덕에 있던 '영화마을'에서 그날 저녁에 볼 비디오를 대여하는 날이었다. 그곳의 부엉이 간판은 여전히 내 뇌리에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그 세대의 흔적이었다. 유년기의 나는 애니메이션을 거의 꿰뚫다 싶을 정도로 매주 빌려봤다. 디즈니의 공주와 영웅 이야기들과 지브리의 엄청난 감정적 세계, 월레스와 그로밋의 클레이 애니메이션과 픽사로 시작되는 모션 픽쳐까지. 유년의 세계는 철저한 허구의 세계로 시작해서 공간감과 실제가 부여되는 과도기의 애니메이션을 그대로 관통했다. 개중에는 로버트 저메키스나 미야자키 하야오, 콘 사토시 등 지금에서야 작품의 가치를 깨닫는 거장의 작품들도 있었다. ('폴라 익스프레스(2004)',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나게 될 확률(2003)', '마녀 배달부 키키(1989)')


그러나 그런 굵직한 애니메이션을 제치고 어린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단 하나의 애니메이션은 고작 러닝타임 78분짜리의 '쿠스코? 쿠스코! (2000)'다. 이 애니메이션을 여전히 생각하는 이유는 단 한 장면 때문이다. 라마로 변한 쿠스코 황제가 파챠에게도 환대받지 못해 엉엉 울면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장면이다. 전형적인 이 장면에서, 갑자기 쿠스코 황제는 제멋대로 그 필름을 돌려버린다. 그리고는 마치 자신이 편집실에 앉아있는 것처럼 제4의 벽을 부수더니 한 장면에서 애니메이션을 정지시킨다. (실제로 그 시간을 정지시킨 것은 아니지만) 붉은 마커를 들고 와 영화를 보고 있는 나에게 말을 걸더니 네가 봐야 하는 곳은 저기가 아니라 빨간 X자 표시의 위치라고 퉁명스럽게 얘기하더니, 아무 일 없듯이 다시 그 서사를 진행했다.


애니메이션이란 저 세계는 나의 유년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비디오의 테이프가 다 돌아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검은 반원이 옮겨졌다 한들, 브라운관이 차갑게 식고 밤이라는 어둠이 다가왔다고 한들, 여전히 디즈니의 공주님들은 살아있었다(고 믿어왔다).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해피엔딩 그대로를 영위하며 안정적인 상태는 지속하리라 믿었다. 그래서인지, 가끔 그 애니메이션 속 커플들은 나의 꿈속에 들어와 자신의 근황을 전하곤 했다. 그랬던 환상은 이 한 장면으로 처참히 붕괴되었다. 쿠스코 황제가 폭군에 가까운 독재자임은 이미 애니메이션을 통해 잘 알고 있었지만, 그의 폭정이 영화라는 세계를 뒤흔들리라곤 6살의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 장면 이후, 나는 좀처럼 영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의 세계에는 없었어야 했던 마커와 편집 기구들 그리고 슬라이드가 등장하는 장면은 더는 그 세계가 영속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했다.


영화와 관객과의 몰입이라는 약속은 그 장면 이후로 붕괴되었다. 더는 어린이집에서 틀어주는 벡터맨 시리즈와, 픽사의 모션 픽쳐 속 인물들이 내 꿈에 등장하지 않았다. 이미 예정된 승리와 이미 예정된 결말이라는 도식에 대하여, 시니컬할 필요 없는 나이의 나는 그것을 체험해버렸다. 기대되지 않았고, 그렇기에 다른 아이들처럼 놀라지 못했다. 물론, 그럼에도 약속대로 흘러가길 바라는 이입은 계속되었지만, 이미 마음 한편에는 이들의 안위를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냉소가 자리 잡았다. 그렇게 붉은 x 표식은 나의 무의식 속에, 두려움과 묘한 쾌감이 혼재된 채 문신처럼 박혀있다. 이따금 내게 몰입을 강요하는 영화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x 표식이 발현되는 건 전부 쿠스코 황제의 폭정 때문이라는 허튼 핑계를 대본다.


2. 영화보다는 음악에 더 관심이 많았던 중학교 시절, 나는 핑크 플로이드와 딥 퍼플로 시작하여 아이스 큐브와 비스티 보이즈를 거쳐, 민트 컨디션과 디안젤로의 음반을 들었다. 그 붉은 x 표식 때문인지 아니면 사춘기의 반항적 심리 때문인지 스노비즘적으로 음악을 사랑했던 나는 고등학교의 진학하여 가장 의외의 선택을 했었다. 밴드부와 흑인음악 동아리를 제치고, 나는 연극 영화 동아리를 들어갔다. 이유는 단순했다. 연영과를 지망하던 선배들이 멋있어 보였다. 배우는 얼굴에 자신이 없었고, 카메라를 다룰 줄 몰라서 PD나 편집 쪽은 가지도 못했다. 만만해 보이는 시나리오로 들어가면, 그 선배들이랑 친해지지 않을까 했다.


막상 동아리에 들어갔지만 나는 시나리오를 써 본 적이 없었기에, 번번이 글쓰기에 실패했다. 그나마 다행히, 글이 서툰 동아리원들을 위해 학교는 입봉을 준비 중이던 독립영화감독에게 소일거리를 주었다. 방과 후 영화 수업을 맡은 그는 항상 시큰둥한 표정으로 영화 몇 편을 틀어주고는 했다. 꽤 많은 영화가 그 시간을 머물다 갔지만, 짧은 단편 하나만이 뇌리에 남았다. 유은정 감독의 '흡연모녀(2004)'. 수업 2개월 만에 처음으로 그가 정상적인 수업을 진행했던 날이었다. 그날의 주제는 '분석적 글쓰기'. 말 그대로, 영화 속 몇 가지 메타포들과, 카메라의 위치, 인물과 대사 등을 면밀하게 살펴보자는 취지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글을 쓰기 위해선,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봐야 했다. 단순한 유희나 몰입으로 체험하는 영화보단, 한 걸음 떨어져 그 영화의 요소를 해체하고 다시 조합해 보는 것. 당연히 우리는 이런 방식의 감상을 낯설어했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처음으로 메모를 했다. 한 페이지 가득 그 문장들이 찰 때에 크레딧이 올라갔다. 이상하리만큼 미묘한 흥분이 영화가 끝난 내게 다가왔다. 이 감정은 영화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었다. 창작할 수 없는 내가 누군가의 완성된 작품을 헤쳐놓고, 그것을 평가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 주는 쾌감이었다. 처음으로 써 내려가는 비평문은 변태적인 흥분과 열등감으로 가득했다. 정신없이 작성한 글은 작문이라기보단, 해부학 실습에 가까웠다. 시체를 대신하여 영화를 올려놓고, 펜이라는 메스를 부여잡고 쇼트를 가르며, 프레임들을 꺼내 나열하는 과정. 차이가 있다면, 숙연하고 신성한 마음으로 대하는 실습생들의 태도와 달리, 나의 메스질은 흥분에 사로잡힌 일종의 범죄 현장을 보는 것 같았다.


성애에 가까운 이 글을 마무리 짓는 순간,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다른 이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채 휘갈겼기에 문장은 난삽했다. 공개하기 싫었던 그 글은 빼앗기다시피 감독의 손에 들어갔다. 나는 이 형편없는 열등감의 잔해에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다. 조소라도 나올까 마음을 졸이던 그때, 그는 말없이 글을 동아리원들에게 건넸다. 그 글이 한 바퀴를 돌면서, 내밀하게 진행된 일련의 과정을 모두에게 관음 당했다는 생각에 모멸감이 들 정도였다. 고개를 처박은 채 얼른 도망치고 싶었던 순간에, 그는 내게 앉아 조목조목 글에 대한 첨삭을 해주며,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영화들을 추천해 줬다. 사실, 그때 추천해 준 영화들은 기억에 잘 나지 않는다. 다만, 내 글을 누군가 읽고 따뜻하게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온기는 또렷이 남았다. 그렇다고 나의 엽기적인 영화 해부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 기이한 전율과 온기는 내게 영화를 사랑할 이유로 충분했다.


3. 영화에 대한 막연한 사랑은 분출구가 없었다. 비겁하게도 영화를 만들 자신이 없는 나는 일찌감치 감독이 되기보단, 영화 옆에 기생하여 글이라도 쓰는 삶을 원했다. 차마, 영화과로 진학할 생각은 못 하고, 그와 최대한 비슷한 미디어학부를 선택했다. 하지만 1년간의 새내기 생활 동안 나는 영화와 거리가 먼 삶을 살았고, 학교에서 영화를 조우할 거라는 기대와 달리 영화를 다룬 수업은 없었다. 소모적인 1년 동안 영화는 다시 취미의 위치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사랑할 대상이 사라진 21살의 겨울은 무의미하게 흘러갔고, 나는 이 권태와 무료를 견딜 수 없었다.


휴대폰을 붙드는 시간만 늘어갔을 무렵, 한 게시물이 눈에 들어왔다. BBC에서 선정한 '21세기 위대한 영화 100편'. 하루에 한 편이라도 영화를 보면 이 공허한 시간이 채워지지 않을까 했다. 눈을 딱 감고, 처음으로 고른 영화가 재밌다면 나는 이 리스트의 영화를 차례차례 정복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내기와도 같았다. 찰리 카우프만의 '시네도키 뉴욕(2007)'은 그렇게 우연한 계기로 나에게 도착했다. 여전히 나의 리스트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이 영화. 무료를 극복하기 위한 내기는 위대한 작품과 마주하면서, 다시 영화에 대한 열정을 점화시키는 계기로 이어졌다. PTA와 핀처, 코엔 형제와 타란티노, 우리 시대에 빼놓을 수 없는 이름들과 마주하며 겨울은 내게 영화를 다시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개강을 앞두고 있을 때에, 나는 목이 바싹 마를 정도로 영화에 대한 지식이 간절했다.


'프랑스 영화 탐색', '독일 예술의 이해', '방송 영화론', '영상미학이론'. 2학년 첫 학기의 시간표는 영화로 가득했다. 주먹구구식으로 영화를 보던 내게 한 학기는 영화사의 자취를 걸을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뤼미에르의 기차로 출발한 학기의 시작은 독일의 표현주의와 시적 리얼리즘을 지나, 할리우드의 황금기를 경유해 누벨바그에 머물렀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세계를 통과해 저먼 시네마의 로드무비를 걸어가며 위대한 시네아스트들의 이름이 한 학기 내내 오르내렸다. 드레이어, 브레송, 고다르, 부뉴엘, 프리츠 랑과 무르나우. 지금 들어도 여전히 버겁고 높게만 여겨지는 이름들이 쏟아졌다. 그들의 영화는 명성만큼이나 내게 충격과 흥분을 자아냈다. 차라리, 영화 속에 파묻혀 죽는 게 좋겠다는 이상한 망상으로 이어질 만큼, 나는 그 한 학기를 영화사의 페이지들 안에 기거했다.


120년의 시간들이 한 학기 만에 밀려 들어오면서, 황홀함은 환각이 되었다. 절대 따라갈 수 없는 양적인 시간을 따라잡으려는 무리한 시도로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부작용은 시네필리아와 스노비즘. 위대한 감독들의 이름을 아는 사실이 스스로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훈장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영화를 체험한 것이 내 존재를 영롱하게 빛내주리라 믿었다. 더 마이너하고, 자극적이며, 어려운 영화에 대한 도착증은 심해졌다. 이젠 영화를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영화를 사랑하는 척하는 나를 사랑하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를 속여가며 보는 영화들이 늘어났고, 점차 이런 괴리에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다.


4. 시네필의 성지가 있다. 종로 3가에 있는 서울 극장의 3층에 세를 들어 있는 서울 아트 시네마. 개봉작들을 상영하는 일반 극장과 달리 이곳은 자체 프로그램을 돌리는 시네마테크다. 과거의 영화들을 큐레이션하는 이 공간에서 연초마다 '친구들 영화제'라는 프로그램을 개최한다. 시네마테크를 후원하는 영화인들이 해마다 영화제 주제에 맞는 영화들을 선정해오고, 그중 수급 가능한 작품들을 상영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공간을 알게 된 이래로 3년째, 나는 이 영화제에서 영화를 관람했다. 그러니, 18년에서 19년으로 넘어가는 그 연초에도 어김없이 영화를 보러 갔다. 이미 현기증은 매너리즘으로 바뀌었던 상태였다. 남들이 얘기하는 명작에 아무 사유 없이 그것을 명작으로 칭하는 데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다. 취향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내 이름을 드높일 영화들을 그저 관람했다는 사실에 합리화하며 자신을 만족했었다. 이 영화제도 그저 귀한 영화를 관람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 것으로 그칠 생각이었다.


그렇게 마주한 두 편의 영화. 아녜스 바르다의 '낭트와 자코(1990)'에는 영화를 보며 경험하지 못했던 숭고한 사랑 고백이 담겨있었다. 그녀는 영화를 통해 남편인 영화감독 자크 드미를 그렸다. 그녀는 그의 유년기와 실제 작품을 뒤섞고, 그 위에 그녀의 기억을 얹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이와 그가 사랑했던 영화, 그리고 그 둘을 모두 사랑하는 그녀의 고백이 위대하게 다가왔다. 인지의 순서가 시간을 앞질러 그의 죽음과 유년 그리고 청년기는 뒤섞였지만, 영화를 사랑하는 그의 모습은 영화의 각 쇼트마다 항상 존재했다.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의 수줍은 모습은 지적 허영에 눈이 먼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극장으로 향하면서 영화를 기대하던 그 마음을 되찾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너무 멀리 온 게 아닐까 후회가 들었다.


몬테 헬만의 '자유의 이차선 (1971)'을 관람한 것은 그 다음 날이었다. 중년의 남성과 히피가 워싱턴 D.C까지 서로의 차를 끌고 경주하는 이 로드무비는 속도감의 끝에 서 있었다. 주인공 히피들은 속도에 완전히 미쳐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위해서 목숨을 걸 정도였다. 영화의 몰입감은 엄청났고, 나 역시 이 대결의 승자가 누가 될 것이며,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했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르며 승부가 갈라지는 순간, 영화는 이런 나와 히피들을 조소하며 산화해버린다. 이 영화에 대해 더 이야기하는 누를 범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이 영화가 끝나고도 쉽게 극장을 나설 수 없었다. 엄청난 전율과 충격, 그리고 반성. 복잡한 감정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두 영화가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시네필리아라는 단어의 무용함이었다. 인지의 순서가 시간의 선형성을 앞선다고 말하는 '낭트의 자코'는 순수하게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쳤고, 영화를 병적으로 분석하며 가치를 찾으려는 내게 '자유의 이차선'은 작렬하게 산화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병적인 집착과 지적인 허영은 나와 영화를 좀 먹게 했다. 모든 도착증적 사랑이 그러하듯, 이상성욕으로 맺어졌던 나와 영화의 관계는 순수함을 상실했었다.


극장에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시네필리아라는 단어를 내게서 지우는 일이었다. 숫자의 굴레와 허영심을 태우고 나니, 더 이상 나에게 시니컬함을 강요하던 유년기의 x 표식도 사라졌다. 불필요한 것들을 태우고 남은 곳에는 설렘이 있었다. 영화를 고르고, 그 영화를 기대하며,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가는 그 순간까지의 모든 영화적 제의를 기꺼이 사랑하는 마음. 그 감정을 회복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시, 스물넷의 만우절. 안토니오니의 ‘욕망(1966)’ 러닝타임 1시간 51분의 순간이 내게 황홀했던 만큼, 나는 그 영화를 순수하게 기대하며 보낸 시간들을 떠올린다. 여전히 영화를 이리저리 해체해보는 짓궂은 취미는 남아있지만, 더는 그들의 영화를 평가하려 들지 않는다. 열등감으로부터 오는 허영에 대한 탐닉은 무용하기에. 그저 노트를 펼쳐, 삼색 볼펜을 들고 이 영화가 내게 걸어오는 말을 들어보려 한다. 우리의 관계가 생동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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