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서부극

《허연 눈깔》

by 문성훈

덥다. '찌는듯한 더위'는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정오를 넘겨도 태양은 식을 줄 모른다. 정오....영어로는 High Noon

모나코 공비가 되어 현대판 신데렐라가 된 그레이스 켈리와 "설마" "정말?" "처음 듣는 말인데" 단 세 마디면 여성을 유혹할 수 있다던 헐리우드의 미남 배우 게리 쿠퍼가 주연한 영화 하이 눈(High Noon 1952)을 기억한다.
새빨간 선혈이 낭자해야 할 총격전을 로맨틱하게까지 느끼게 준 흑백 영화은 내 어린 시절을 장식한 추억의 비눗방울이다.



그 사자는 이미 뼈만 남았겠지만 그 우렁찬 포효는 명화극장을 알리는 슬레이터 소리였다.
그 시절 우리집은 어른이라면 웅크리고 지나야 할 좁은 골목을 지나 부엌으로 난 출입문이 있는 셋방살이였다.

주인집 녀석은 나와 동갑내기였는데 그 집 마루에 TV가 있었으니 명화극장이나 김일의 레슬링 시합이 있는 날이면 그 녀석의 비위를 맞춰야만 했다. 혹시라도 낮에 싸웠다면 나는 마당을 건너 멀찌감치 물러서서 봐야만 했다.

그래도 우리집 장자인데 기죽어 지내는 모습이 싫으셨나보다. 그때까지도 '새댁'으로 불리던 엄마가 아버지의 반년 월급에 맞먹는 흑백TV를 들여놓으셨다.
내 공이 컸다.
아마 이렇게 전격적으로 사시겠다는 마음은 아니셨을텐데 엄마를 따라 간 가게에서 말도 못할 개구장이였던 내가 그 진가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신기해하며 그 물건을 이리저리 살피다 기어코 귀뚜라미 더듬이같은 안테나를 부러뜨리고 만 것이다.
아직도 난감해하며 울상이던 엄마의 얼굴이 선연하다. 맞았던 기억은 없다.
그렇게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들여온 한쪽 안테나 부러진 흑백TV로 나는 행복했다.

하물며 그 TV는 유명하디 유명한 일제 SONY였다.
지금 막내 동생네 거실 TV는 무려 82인치다. 그 웅장하고 선명함이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자랑스럽게도 우리나라 LG제품이다.
디자인에 반해 가성비 떨어지는데도 무리해서 손에 넣었던 SONY VAIO노트북은 그 후 세 번에 걸쳐 국산 노트북으로 교체되다 퇴역했다. 가끔 옛 정에 꺼내보면 크롬OS에서도 버벅거린다.
가장 얇고, 가벼운 노트북은 단연 국산제품이다. 물론 비싸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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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하이 눈(High Noon)으로 돌아가자.
동네 꼬맹이들은 명절이면 친척에게 받은 용돈으로 산 장난감 딱총 한 자루씩을 허리 춤에 차고 나온다.
공을 잘차든 못차든 축구를 하려하면 골키퍼는 안하려 들고 센터포드를 하려고 다툰다. 총싸움도 마찬가지다. 악당은 싫다. 주먹 센 놈이 보안관 차지다. 악당은 언제나 '으악'하며 죽어줘야 하니까....

게리쿠퍼는 보안관이다. 멋진 보안관이니 막 결혼한 아내도 이쁘다. 이뻐서 그레이스 켈리다.
그런데 악당이 곧 들이닥칠텐데 마을 사람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 심지어 마을유지는 어서 마을을 떠나라고 재촉한다.
어느 영화에서나 주인공은 도망치지 않는다. 마침내 아내를 떠나보내고 홀로 맞서 싸우는데 쏘지도 않은 악당 한 명이 쓰러진다.
돌아 온 아내가 총을 잡은 것이다.
아내는 아빠와 오빠를 총격에 잃은 퀘이커교도(기독교의 한 종파)다. 퀘이커교도는 비폭력을 추구하니 총을 쥐지않는다. 오죽하면 독립전쟁에도 참전하지 않았겠는가.
그런 그녀가 총을 쥐었다. 악당을 쓰러뜨렸다. 사랑하는 남편마저 잃고 싶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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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흉악한 악당이 들이닥쳤다. 이름은 아베라는데 사무라이마을 출신이다.
마을 유지 몇명은 보안관을 돕기는 커녕 아베를 두둔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먼저 들고 일어났다.
곡괭이, 갈퀴, 쇠스랑을 들고 모였다.
사뭇 그 의기충천한 기세에 아베일당이 주춤한다.
악당은 마을사람들 등뒤에서 그들이 아닌 같은 마을사람들을 겨냥하고 있는 몇몇 배신자들을 믿고 있는 모양이다.
개중에 여자도 있다 아베가 이전에 품었던 나베라는 여자도 보인다.

하지만 아베는 사태가 심상찮다는 것을, 괜히 조용한 마을을 들쑤셔놨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는 중이다.
이럴 때 자신만 챙기는 배신자들이 약삭빠르기로는 누구못지않다. 슬금슬금 자기 마을사람들을 겨누던 총구를 감추고 있다.
느닷없이 그 배신자무리 중에 한 사람이 튀어나오며 아베에게 욕짓거리를 해댄다. 손에는 삽을 들었다.
좀전까지 아베편을 들던 무리에서 대변인을 자처하던 Min이란 자다. 누구도 하지 않는 욕설을 해대며 연신 침을 뱉는다. 더럽다. 퉤 퉤 손바닥에도 침을 뱉는다.
갑자기 '삽질'을 해댄다. 아베를 묻겠단다. 아직 총격전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뜬금없다. 삽질의 유래가 될 모양이다.
마을 목사는 아베의 자비를 구하며 교회에서 기도 중이다. 마을사람들은 어차피 그에게 쥐어 줄 총은 없으니 마음껏 떠들라며 내쳐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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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서부극의 결말이 궁금하다.
하이 눈에서는 보안관 혼자서도 물리쳤던 악당인데 마을사람들까지 나섰으니 분명 해피엔딩일 것은 자명하다.
그래서 영화에서처럼 보안관 뱃지를 땅바닥에 던지고 떠나는 보안관 쿠퍼와과 아내 캘리를 멀뚱히 바라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어쩌면 아베의 그녀가 '허연 눈깔'을 드러내며 기절할 지도 모른다.
아는 결말인데 그래도 어린애처럼 궁금하다.
보안관을 행가래치는 장면이 나올 지 모른다. 아니면 보안관이 마을사람들에게 큰 절을 올리면서 'The End' 자막과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 수도 있다.

어른인데 아이로 돌아가게 해 준 아베가 한편으론 고맙다.
그래서 다들 아베 아베하는가 보다. 감사하다고 하면서...
Thank you A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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