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외가 마을 정경을 그려내고 소소한 에피소드를 기억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친가에 비해 부유했었고 명문가였으니 동네에서 "어느 어르신 손자"로 VIP대우를 받고 당시에는 귀했던 양과자와 미제코코아를 먹을 수 있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어떤 것은 어른들끼리 하던 얘기를 잊지않고 있다가 요즘에서야 불현듯 어머니께 여쭤보면 "니가 그걸 어떻게 아냐?"라고 신기해 하신다.
그 중 한 토막이 어머니가 어린 시절 할머니 심부름으로 할아버지를 찾아 기생집에 가셨다는 얘기다. 할아버지께서 전통춤을 기막히게 잘 추셔서 기생집 마당에서 그 춤사위를 넋을 놓고 봤노라 했던 얘기를 기억해 여쭸봤었다. 기억은 정확했고 어머니는 또 한번 놀라셨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친가어른들은 지고는 못가고 마시고는 간다 할 정도의 주당들이시고, 외가집은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도 술을 못드시는 분들이다. 오죽하면 어머니 평생 소원 중 하나가 남들처럼 술 한 잔 마셔봤으면 좋겠다는 거다. 유전자에 알콜분해효소가 없다보니 외할아버지 역시 술은 못하셨다고 한다. 술기운을 빌리지 않고도 풍류를 즐기셨다니 예인 기질이 있으셨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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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대해서는 상반된 두 집안의 만남으로 태어난 우리 형제의 주량도 갈린다. 나는 술을 잘하는 편이고, 막내동생은 술을 아예 입에도 못댄다. 소주 한 잔이면 응급차를 불러야 할 정도다. 사업 수완이 좋아 나름 성공한 축에 드는 동생은 영업이 필수인 업계에 있다. 자주 술접대가 있다, 신기했다. 궁금증 역시 술자리에서 풀렸다. 동생이 주당인 손님 두 분을 모시고 술자리를 가지는데 인테리어와도 연관이 있다고해서 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동생을 빼고 손님 두 사람과 나 이렇게 세 사람이 불콰하게 술기운이 올랐을 때 밴드가 들어왔다. 그때 알았다. 전에는 몰랐던 동생의 기막힌 재주를.... 술 한잔 안마시고도 그렇게 흥에 겨워 잘 노는 사람을 동생말고는 본 적이 없다. 동생은 외탁을 그것도 외할아버지를 빼다박은 셈이다. 그렇게 자리를 파하고나면 언제 그랬냐는듯 의관을 정제하고(?) 나머지 일행을 제 차로 귀가시켜주니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술자리만 있으면 부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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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워도 마시고 괴로울 때도 마시기 마련인게 술이다. 평소에 못한 말을 하게도 하고, 실수를 하게도 한다. 하룻밤만에 십년지기 친구가 되게 하고 친구가 원수가 되게도 하는 요상한 물건이다. 신의 선물이라고 했다지만 신의 심술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마약, 대마초와는 달리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것들중에 유일하게 허용된 기호품이다.
예로부터 술을 좋아하고 노래 춤을 좋아했던 한민족이니 다양하고 좋은 술이 많았단다. 그 술들을 지금 우리가 마시는 몇 종류로 획일화한것이 일제 강점기 주세법이다. 세금을 징수할 목적으로 어느 집에서나 고유한 비법으로 담그던 술 주조를 금지한 것이 발단이다. 이전부터 내려오던 증류식 소주가 희석식 소주로 바뀌게 된 것도 그 즈음이다. 그러니까 희석식 소주로 과음한 다음날 머리가 깨질듯한 숙취도 알고보면 그네들 탓이다(?). 민간에서 술을 담그지 못하게하니 조상 제사상에 올리던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술을 숨겨서 담기도 했단다. 효자, 효부를 졸지에 밀주업자(?)가 되게 한 셈이다. 그렇게해서 명맥이 끊기지 않고 살아남은 전통주가 이강주, 진도 홍주, 문배주,안동소주 등이다. 손꼽을 정도다.
우연히도 그 시기에 미국도 밀주가 성행했었다. 갱스터 알 카포네가 활약했던 금주법시대(1919~1933)에 그랬다. 조선과는 달리 땅덩어리가 넒으니 허술하게 장독대가 아니고도 숨길 데가 많았을테고, 만들 장소도 지천에 널려 있었을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술과 유흥은 뗄레야 뗄 수없는 관계이다보니 현대에 이르러 많은 뮤지션들이 술을 소재로 노래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밥 딜런이 금주법시대 구전 민요를 바탕으로 부른<The Moonshiner> < Copper Kettle>도 그렇다. 제목과 가사에 나오는 Moonshiner는 밀주업자이고, Coper Kettle(구리주전자)은 실은 Copper Kettle Still(밀주위스키 제조에 쓰던 소형증류기)를 뜻한다. 밀주업자란 단어에도, <Copper Kettle> 가사 中에도 'moon is bright~ ' , 'pale moonlight~'로 "Moon"이 들어가는 것이 이색적이다. 밀주 만드는 사람들이 깜깜한 밤중에 달빛(moonshine)에 의지해 산골이나 으슥한 장소에 있는 밀주제조창을 드나드는 것에서 Moonshiner란 이름이 유래됐다고 한다. 그래서 노래 가사에도 "달이 밝을 때~"(moon is bright~), "희미한 달빛~" (pale moonlight~)이 나오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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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다보니 우리나라 사람에게 술은 일본이란 나라와 어쩔 수 없었던 밀주와도 연관이 된다. 지금에 와서는 여름에 즐겨찾는 맥주마저 입맛을 따르지 못하게 만들었다. 내게 있어 술과 일본은 악연인 셈이다.
분명 그 시대에는 밀주업자가 범법자였을텐데 Moonshiner라는 시(詩)적인 이름을 가지게 된데는 그만한 사연이 있을거다. 간만에 달(Moon)도 좋고, 운명인지 우연인지 조상께서 물려주신 내 성(性)도 문(Moon)씨인데다 숨어서 마실 필요는 없지만 내 나라 맥주를 사다먹다보니 이런 저런 생각이 엉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