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사장님" "오늘은 많이 늦으셨네. 뭘 드실까?" "김치찌개 아니 된장찌개로 하죠 뭐" 김치도 손수 담근 것이니 굳이 김치찌개로 끓이지 않아도 된다.메뉴판 볶음류에는 까만 매직으로 2인분부터라고 덧쓰여 있다. 동태찌개도 2인분부터 주문 가능하다.
물은 셀프다. 족히 십여년이상 썼다는 하얀 플라스틱 물컵은 얼마나 씻어댔는지 윤기가 사라진지 오래다. 마치 석고로 만든 컵같지만 나는 일부러 이 컵을 쓴다. 새 스텐 컵도 같이 놓여져 있는데 굳이 흰 컵을 쓴다. 대강 훑기만해도 깨끗해 보이는 스텐 컵과는 달리 이 컵은 정성스레 닦지 않으면 안된다. 주인장이 알려 준 팁이다. 그래도 못버린다단다. 오래 정이 들어서....
이 식당에 오려면 사람이 한꺼번에 몰리는 점심시간을 피하거나 늦은 저녁을 감수해야 한다. 유명한 식당이어서가 아니다. 알려지지도 않았고 앉은뱅이 탁자가 5개이니 고작 스무명 남짓 되는 손님을 받을 수 밖에 없어서다. 게다가 다른 직원들은 깔끔하고 세련된 것과는 거리가 먼 공사장 함바같은 분위기의 이 식당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내심 느즈막한 이 점심 식사를 홀로 즐기는 걸 좋아한다. 홍대 부근에서 직접 손으로 다듬어야야만 하는 고추잎 나물, 고구마 줄기 무침을 내놓은 내가 아는 유일한 식당이다. 무슨 메뉴를 시켜도 반찬에 먼저 손이 가고 청국장을 제대로 끓인다.
연세는 여쭤보지 않았지만 60대 초중반의 부부 두 분이서 운영하신다. 내가 들르는 시간은 복작대던 손님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쉬는 시간이다.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얘기와 살아 온 얘기를 나누는 재미도 쏠쏠하다. 후미진 골목 허름한 건물1층에 자리 잡은 이 식당의 주 고객은 인근에서 육체 노동을 하는 분들이다. 긴 목 안전화 끈을 풀고 다시 매야하는 번거로움이 있는 좌식인데도 기꺼이 이 곳을 찾는데는 다들 집 밥에 이끌려서이다. 한식이라 회전율도 떨어지고 아주머니 혼자 요리를 하니 많은 손님을 받을 수도 없다. 다행이라면 단골장사여서 고정수입은 된다는 정도일거다.
주방 옆을 난 작은 쪽문이 주차장으로 통하는데 주로 거기 수돗가에 쭈그리고 앉아 채소를 다듬는다. 항상 차 한대가 주차되어 있다. 두 분이 출퇴근하는 차다. 은색 벤츠다. 연식은 좀 돼보이는데 플라스틱 물컵처럼 항상 깨끗하게 세차가 되어 있다. 그 벤츠를 볼 때마다 왠지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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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쯤에 아우디Q5를 팔았다. 7년을 탔는데 상태가 좋다고 중고가격을 후하게 쳐줬다. 유지비도 만만찮은데다 한 집에 차가 두 대일 이유도 딱히 없고 원래 운전하기를 싫어해서다. 그날로써 운전기사가 딸린 고급승용차 뒷좌석에서 졸아보겠다던 오랜 꿈은 막을 내렸다. 대신 더 큰 버스를 주로 이용한다. 기사 월급 걱정은 안해도되고 유지비도 훨씬 적게 든다. 가끔 현장이나 미팅 장소를 가면 차가 없는 사람은 나 혼자다. 우리 직원들도 모두 차가 있다.
요즘 현장에 일하는 연세 있으신 반장급들의 개인 소유차량은 다채로워졌다. 대형차들인데다 외제차량도 자주 띈다. 그 역시 기분 좋은 일이다. 온갖 먼지와 소음속에서 육체노동으로 적지않은 세월을 보낸 사람들이다. 그만한 호사를 누릴 권리가 충분한 사람들이다.
지금 나는 백팩에 벙거지를 눌러쓰고 심지어 슬리퍼를 끌고 나가더라도 만나는 사람에게서 대우를 받는다. 상대는 이미 나를 알고있고 내 명함이 병풍역할을 한다. 꺼리낌 없이 차를 얻어타서 정류장에 내려달라고 하면 상대는 내가 차를 안가지고 다는니는 데에 무슨 깊은 뜻이 있는 줄 안다. 설사 모르는 사람을 만나게 되더라도 주눅들지 않는다.
하물며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유명세를 가졌거나 명함이 무거운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작거나 눈에 띄지않는 국산차를 타고 다닌들 어떨까싶다. 그런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과시할 이유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식당 주인장 부부나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은 그렇지 못하다. 아무리 재산이 많고 자식을 성공시켜놨어도 그 분들의 직업, 행색으로 폄하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짜고짜 편하게 대하려는 고약한 사람들을 자주 본다. 그래서 내가 그 분들이 아주 크고 비싼 차를 타고 다니시는 걸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이 분들만큼은 호텔, 식당 어느 장소, 누구와 만나더라도 승용차 때문에 차별 대우를 안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식당 주인장 부부와 현장 작업자들의 승용차를 운심히 챙겨보는 건 내 개인적 경험때문일지도 모른다.
젊은 날 처음 내가 구입한 차는 기아 프라이드였다. 그 차를 몰고 63빌딩 한영애 콘서트를 보러갔다. 내 차를 힐끗 본 주차요원이 만차라며 제지를 했다. 그런데 내 뒤에 있던 최고급 외제승용차는 들여보내줬다. 그 차도 벤츠였다. 까만색 그날 콘서트 초반 공연을 못봤다. 빌딩 인근이 한때 경적소리와 차량정체로 소란했다는 정도는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아마 63빌딩이 생긴 이래 최초로 발렛파킹을 받은 프라이드 소유주로 기록됐을 지도 모른다. 지금 그 세태가 변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