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후 신입으로 입사를 하니 외근이 잦다고 업무용 차량 한 대를 배정해줬다. 쥐색의 현대 엑셀 밴이었다. 적은 양의 화물을 싣기도 좋고 무엇보다 때가 타지않는 색이라 마음껏 굴리기에 그만큼 편한 차가 없었다.
내가 맡은 일은 회사 소유의 건물이나 사업장의 인테리어 디자인을 잡고 회사에 등록된 여러 인테리어 회사중에 한 군데를 선정해서 작업을 맡기는 것이었다. 당연히 관리감독도 내 책임이었다. 다른 동료들은 황금보직이라고 했다. 시쳇말로 '갑'오브 '갑'이었던 셈이다. 인테리어 현장을 찾으면 유일하게 정장을 차려 입은 사람이 나였다.
그 쥐색 밴을 몰고 신촌에 있는 빌딩 현장을 찾았을 때였다. 도로변 신축건물 1층이 현장이다. 다른 층은 아직 임대가 나가지 않았다. 전면에 족히 4~5대는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꽉 차 있었다. 인근 유료 주차장을 찾기도 난감한데 뒷 차량들에 떠밀려 건물 주변을 몇 바퀴 돌자 은근히 부아가 돋았다. 어쨌든 그 현장에서 나보다 윗 사람은 없다. 시원찮은 에어컨 바람에 땀이 비질거릴거리고 나온다.
비상등을 켠 채 인도에 정차를 시켜두고 내렸다. 그제서야 차를 알아본 것인지 나를 본 건지 누군가 쫓아 나온다. 현장을 맡고 있는 인테리어 회사 사장이다. 나보다 한 두살 많았는데 아버지가 주유소 서너개를 소유한 부자라 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바로 회사를 차렸다. "아이구 오셨습니까" "여기 차들 당장 다 빼라고 하세요" "네?" '앞으로 화물차외에는 아무도 여기 차 못대게 하시라구요" 이내 사람들이 자동차 키를 들고 나왔다. 모두 아는 면면이다. 목공, 도장, 금속.... 오야지(반장)들이다. 평소 그 젊은 사장보다 더 막역하게 친하게 지내던 분들이다.
이 날만큼은 내 서슬에 슬금슬금 작업복 먼지를 털면서 각자 차에 시동을 걸었다. 현장을 파하면 작업복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퇴근하는 것이다. 그렇게 비워진 주차 구역에 쥐색 밴 한대만 당당하게 놓여졌다. '밴'은 어쨌거나 '화물차'가 분명하다. 몇 시간 둘러보고 떠나면서 '주차금지령'을 해제시켰다. 항상 한 자리는 남겨두라는 조건은 달았지만.... 그야말로 '꼬장'을 부린 것이다. 그때만해도 나는 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