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FRENTE HACIA EL OESTE

by 문성훈

그는 가난한 이민 한인의 9남매중 장남이다. 총명했던 그는 가출까지 감행하며 초등교육까지만 시키려던 아버지의 뜻을 꺾고 마침내 한인 최초로 쿠바 아바나대학 법대생이 된다.

아시안으로는 기골이 장대하고 잘생긴 청년. 한국명은 '임은조(1926~2006)'지만 '헤로니모 임'으로 더 알려졌다.
대학에서 만난 동기가 피델 카스트로다. 쿠바혁명 와중에 도시에서 비밀조직에 가담한 공로로 혁명이 성공한 후 관직에 오르게 된다.
타고난 자질과 능력으로 '체 게바라'가 산업부 장관이던 시절 차관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한인의 변호사를 자처하며 동포를 위했던 그였지만 그때까지도 그에게 조국은 쿠바이고 아버지의 조국이 코리아였을지 모른다. 그마저도 남한이 아닌 형제국이나 다름없었던 북한이었다. 만날 수 있었던 한국인은 북한외교관뿐이었던 시절이다.



헤로니모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 임천택(1903~1985)이다. 1905년 일제의 거짓 선전에 속아 이름도 생소한 멕시코에서 애니깽을 베며 노예에 가까운 생활을 했던 한인의 자손이다.
일제의 강점으로 돌아갈 나라를 잃고 더 나은 환경을 찾아 마침내 정착한 나라가 쿠바다.

한인들은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고국의 독립을 위해 쌀 한숟가락씩을 거둔다. 그 자금을 독립군에게 전달하고 한인 학교를 세워 조국의 언어와 풍습을 잊지않도록 한 인물이다. 백범은 백범일지에서 '임천택'의 고마움을 기록으로 남긴다. 그가 헤로니모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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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은퇴한 만년의 헤로니모를 초청한다. 나로선 9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찾은 한국이 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백발이 된 노인이지만 택시 운전사를 하며 쿠바 전역의 한인들을 찾아 나선다.
그들의 역사를 책으로 엮고 뿌리를 잊지말아야 한다며 후손들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한글을 배우게 한다.

정작 그는 한국말을 할 줄 모른다. 아버지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한국말을 배우지 않은 뼈저린 후회를 후손들이 하게 하고싶지 않다.
마침내 그의 나이 일흔 다섯에 눈물겨운 성과를 이룬다. 2001년 쿠바 이주 80주년을 맞아 한인들의 최초 도착지였던 마나티항구에 '한인이주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그가 손수 그린 기념비 설계도면에는 "FRENTE HACIA EL OESTE (정면이 서쪽을 향하게...)"란 글이 크게 적혀있다.
서쪽에는 내 조국, 한국... 아버지가 그토록 밟고 싶어하던 고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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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땅 증조부의 묘소를 찾은 후손들의 피부색이 까무잡잡하다. 혼혈이다. 한국말도 모른다.
하지만 할아버지를 기억하고 증조할아버지를 기린다. 한국은 그들의 조국이다.
할아버지 헤로니모 역시 쿠바를 위해 싸웠고 한국말을 못배워지만 한국을 잊지않도록 가르쳤고 마침내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잠들었음을 알고있다.
그의 후손이다. 피부색은 다르고 한국말을 쓰진않지만 그들 심장에는 한국의 얼이 뛰고 있고,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나는 그들을 '피부색 다른 한국인'이라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이 찾은 한국땅 그 한가운데에서 태극기가 나부낀다. 할아버지를 태평양 건너로 내몰고, 당신의 형제와 자매, 동포들을 총칼로 도륙하고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국땅을 더러운 군화발로 짖밟은 나라, 당신이 눈물지으며 부르던 애국가와 아리랑을 못부르게 입을 틀어막은 자들.
그 나라를 위해, 그 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아우성을 지르고 몸부림 친다.

태극기를 쥐고 일장기를 흔든다. 한국말을 하며 일본말이 모국어인줄 안다. 한국 대통령을 욕하고 일본 수상을 추앙한다.
우리와 같은 얼굴을 하고 한국말을 하지만 나는 그들을 '한글 쓰는 일본인', '토착왜구'라 부른다.

머나먼 타국 땅 헤로니모와 한인들이 세운 기념비는 한국땅, 서쪽 하늘을 바라보지만,
한국에 살며 한국말을 쓰는 일본인 그들은 동쪽. 일본열도를 향해 절을 하고 울부짖는다. 오늘도...



KBS가 가끔 수신료가 아깝지 않은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가 있는데 <KBS스페셜 헤로니모를 찾아서...>가 그랬다. 못보셨으면 꼭 챙겨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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