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혹은 어느 회사가 진행하던 프로젝트의 디자인 안을 건축주가 마음에 안들어 해 몇번 시도끝에 프로젝트 전체가 무산될 위기나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 급하게 찾는 일이 그런 류의 일이다. 대개 진행하던 중 막히거나 이미 제출안 안이 거부당한 일들이라 시일은 촉박하고 업무강도는 높아진다.
업무 프로세스상 시간이 부족한 것도 부담이지만 심리상 몇 번의 실패가 있은 뒤라 건축주의 섭입견은 부정적이고 그의 기대를 충족시키려면 일반적인 기대치보다 더 높은 수준이어야 한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류의 작업을 좋아하고 즐기는 편이다. 남들이 손을 놓은 까다로운 인테리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을 때만큼의 쾌감을 준다. 그 동안은 신경직적이고 예민해 있어 가족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몇날 며칠을 밤을 새야하는 경우가 다반사라 건강상 자주 할 수는 없지만....
오늘 미팅은 강남에서 있었다. 어차피 거부할 수 없는 친한 형님의 다급한 부탁이 있었기도 하지만 나로서도 꽤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프리젠테이션은 순조로웠고 반응도 무척 좋았다. 프리젠테이션은 강의와 비슷하다. 바로 반응을 읽어낼 수 있고 기대에 못미치는 반응이면 순발력있는 대처를 해야한다.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마쳤을 때 단 한 마디의 부정적 질문도 없었고, 굳이 그들의 칭찬이 아니어도 프리젠테이션 내내 흡족해하는 표정만으로 결과는 예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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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강남에 나왔으니 기분도 상쾌하겠다 어머니를 뵈러 갔다. 오후 5시. 우리 새끼, 사랑스러운 꼬맹이 조카도 집에 있을 시간이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구실은 어머니인데 목적은 조카가 되니 본말이 전도된 느낌이어서 왠지 어머니께 죄송하다.
어머니집에 들러 가방을 내려 놓고 의뭉스럽게 "우리OO이...어린이 집에서 왔으려나..." 혼잣말처럼 얘기를 흐렸다. "전화해보라미... 데리고 오지는 말고 쉬그로..." 제수씨에게 전화를 했다. 동생과 나이차가 많은 제수씨는 내 큰 사촌조카와 동감이다. 시아주버니가 간혹 전화를 하면 으레 고녀석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란 걸 알기에 요즘은 빨리도 바꿔준다.
"여보세요~" "네 아주버님~ㅎㅎ OO이 지금 단지안에 있는 도서관에 갔는데..." 예전에 하던 '잘 지내시죠'가 두사람의 대화에서 빠진지도 꽤 됐다. 하기야 자주 보기도 하고 수시로 연락하니 안부는 늘 알고있지만 말이다. "아~ 그래요" "네~ 오늘 집에 선생님 오는 날인데... 책보고 싶다고해서 같이 갔어요. 어쩌죠..?" "아 거기 분수옆에 있는 건물안에 있는 거죠. 압니다. 제가 가보죠 뭐" "네 ㅎㅎ OO가 너무 좋아하겠네요"
고녀석 위 아래로 오빠와 막둥이 남동생은 챙기지도 않고 끊었다. 초등생 큰 놈은 같이 놀아주려면 이제 버겁고,작은 놈은 이유식중이라 대화(?)가 어렵다. 그래도 막둥이는 나만 보면 달려든다. 시샘이 많아 지 누나가 내 무릎에 앉은 꼴을 못보고 밀쳐 낸다. 그리고 지가 무릎에 앉아 놀아달랜다.
3분거리에 있는 동생네 아파트 단지로 갔다. 전면 유리로 된 어린이도서관에 모녀지간으로 보이는 두 쌍이 앉아있다. 조카가 보인다. 놀래켜 주려고 들어가려하니 입주민 카드로 연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할 수 없이 고 녀석이 고개들면 보이는 창가로 갔다. 놀래켜주긴 글렀다. 그래도 사이에 분수가 있어 4~5미터 떨어진 거리다.
분수조형물에 얼굴을 괴고 쳐다보는데 금방 고개를 들더니 나를 봤다. 보자마자 벌떡 일어서서 출입구쪽으로 달려간다. 입모양으로 들린다 "와~ 큰아빠다" 나도 뛰었다. 쪽 쪽 쪽 아이구 내 새끼를 연발하며 재회의 기쁨을 만끽하느라 선생님이 곁에 있는 줄도 몰랐다. "아이쿠 안녕하세요" "아 네...ㅎㅎ 큰아빠시죠? 결혼하기로 하셨다면서요? 어찌나 큰아빠 얘기를 많이 하는지...ㅎ" "그랬어요 ^^"
어머니집으로 데리고 오니 그동안 배운 발레동작, 노래 그리고 안마해준다며 어깨를 주무른다. 그렇게 효도(?)를 받고 있는데 퇴근한 동생이 데리러 왔다. 목욕시키고 밥을 먹여야한단다. "싫은데... 큰아빠랑 놀고 싶은데..." "그럼 밥먹고 다시 오자. 알았지?"동생이 설득한다. "네~~~! 큰 아빠가 갔다가 밥만 먹고 빨리 오께요. 큰아빠집에 가면 안돼요. 알았죠?" "응. 그래" "꼭요. 약속해요. 빨리 오께요 빨리... 알았죠?" "응~~" 그렇게 제 집으로 갔다.
나 역시 오랜만에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저녁을 먹었다. 갑자기 창 밖으로 빗소리가 들린다. '어... 비 오네....' 내일 아침일찍 약속이 있어서 오늘은 어머니집에서 못자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밥상을 물리고 커피 한 잔을 하는데 폰 알람이 울린다. 우리 일가족 톡방이다. 제수씨가 동영상과 여러장의 사진 그리고 사연을 올렸다. 동영상을 눌렀다. "진짜 약속했다고..." "누구랑 무슨 약속했는데...?" "큰아빠랑.... 큰아빠한테 가기로 약속했는데...." "근데 OO야 지금 봐봐 비도 많이 오고... 밤이 돼서 깜깜하잖아" "우산쓰면 되는데...." "그럼 ㅇㅇ(막둥이 지 동생)이는 어떡해... 비맞고... 응? OO야~" ". . . . . . . . 으아앙~~~~"
동영상과 여러 장의 사진 밑에 제수씨가 톡을 보냈다. '큰아빠랑 약속했다고 울다가 이제 진정됐어요. ㅎㅎ' '어떡하지. 우리 새끼....아까 약속했는데... ㅎㅎ' 내가 답했다. 'ㅇㅇ가 진정하고... 또 약속했는데 비가 와서 못간다고 큰아빠한테 미안하다고 해요 ㅎㅎㅎㅎ' 바로 답장이 왔다.
제수씨에게 전화를 했다. 바로 바꿔준다. "큰아빠~~~" 괜찮다고 안미안해도 된다고하고 두 밤만 자고 또 오겠다고 했다. "야~ 신난다. 꼭 와야해요. 꼬옥~~" 큰아빠 보러갈거라고 백설공주 드레스도 입었다는데....
가족사진은 왠만해서 안올리는데 이건 너무 사랑스럽고 이뻐서 잠시 올린다. 드레스 치마만 입고 큰아빠한테 못간다고 주저앉아 우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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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을 들고 버스를 타러 나서는데 비가 그쳤다. 세상이 정신없이 돌아가다가도 느긋해지는 타이밍이 있고, 이러다가는 지구가 당장 망할 것처럼 비관적이다가 가끔 들려오는 흐믓한 소식에 가라앉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