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병원에서 태어나 도심에서 자란 요즘 세대들이야 그렇지않겠지만 나처럼 소도시에서 태어난 중년 세대에게 시골 외갓집은 정서적인 공감대를 가지는 특별한 추억 저장소다.
나의 외가는 경남 의령이다. 유년 시절 남산 밑을 헤집고 다닌 저녁이면 엄마 무릎을 베고 남강의 솥바위 전설을 듣다 잠이 들곤 했다. 그 남산 밑자락에 홍의장군 곽재우 사당이 있다. 붉은 옷만으로도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는 의병장 곽재우를 시골 유생으로만 알고 있다 어른이 된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그는 문과에 급제를 했으나 답안에 당시 임금인 선조를 비판한 내용이 있다하여 합격이 취소되어 낙향해서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마흔까지 세월을 낚았다. 그가 청년시절까지 무업(武業)에 뜻을 두고 있었다는 기록을 보아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친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닌듯 싶다. 또한 장인인 김행 역시 무관이었던 영향이 큰듯한데 김행은 퇴계 이황와 쌍벽을 이룬 성리학의 거두이자 경상우도(서부 경남)을 중심으로 한 남명학파의 시조 남명 조식의 사위가 되는 사람이다. 즉 남명의 외손녀와 혼인을 했을 뿐만아니라 그의 제자이기도 하다.
특이하게도 남명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곽재우, 정인홍,김면이 임진왜란 경상도 3대 의병장이다. 뿐만 아니라 이노, 전치원, 하락, 조종도등 50여명의 제자 또한 당시 활약한 의병장들이다. 스승인 남명이 '칼을 찬 선비'로 불려서 제자들에게 그 무인 기질이 배여있었나 싶었는데 실제 남명의 칼은 경의검이라 하여 주역의 경(敬)과 의(義)를 학문과 처신의 지표로 삼았다는 의미로 찼다고 한다. 그보다는 남명이 동갑인 퇴계와는 달리 성리학 이론에 치중하기보다는 실용적이며 실천. 의(義)를 중시했다는 것이 그의 제자들이 풍전등화에 놓인 나라와 백성을 위해 기꺼이 몸을 일으키게 하지 않았나 짐작케 한다.
평생 벼슬길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부패한 중앙정치에 서슬퍼런 비판을 서슴치 않았고 비록 임진왜란 20년전에 세상을 떠났으면서도 미리 왜국를 경계했으며, 학문하는 자들의 올바른 처신을 강조했다는 면에서 시대를 아우르는 참 스승이었으며 예지자(叡智者)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토정 이지함과의 교분이 남달라서 그랬겠냐만 지금 대한민국의 가까운 과거 그리고 현재 그리고 미래에 있어 그가 말한 바가 예사로이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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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명종의 모후이며 모든 권세와 전횡을 일삼던 문정왕후를 "깊숙한 궁궐의 한 과부(寡婦)"라고 공개 비판한 대목에서는 대통령을 손바닥에 올려 놓고 꼭두각시로 내세웠던 최순실이 떠올려지고, 수많은 정치인과 관료들 중 어느 누구 하나 감히 나서지못하고 그녀의 치맛자락에 매달렸던 사실때문에 후손의 한사람으로서 부끄럽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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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각종 비리와 부패, 이권과 밥그릇 싸움에만 열중하는 지금의 정치인과 검찰을 비롯한 관료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리고 그런 정치환경에서 날로 피폐해지는 가계 수입으로 생계가 위태로운 서민들을 생각하면 그가 올린 상소문에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군민의 정치와 나라의 여러 사무가 모두 도필리(刀筆吏 아전)의 손에서 나옵니다. 이들은 대가를 주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안으로는 재물을 모으니 밖으로는 백성들이 흩어져서 열에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각자 주와 현을 나누어 사유물로 삼고 이를 문권(文券)으로 만들어서 자기 자손들에게 전하기까지 합니다. 또한 백성들이 공납으로 바치는 토산물들도 모두 물리쳐서 납부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면 공납품을 바치는 사람들은 구족의 것을 모으고 가업을 모두 팔아넘겨 관아에 내지 않고 (아전들의) 사삿집에 내는데, 이때 본래 값의 100배가 아니면 받지도 않습니다. 그 뒤로도 계속 이렇게 납부할 수 없게 되어서 빚을 지고 도망가는 사람이 줄을 잇습니다. 조종(祖宗)의 주현 백성들이 바치는 공납을 새앙쥐 같은 놈들이 나누어가지고, 전하께서 누리시는 온 나라의 부(富)가 이들이 방납한 물자에 의지한 것일 줄 어찌 상상이나 하셨겠습니까? 왕망이나 동탁처럼 간악한 놈들도 이러지는 않았고, 망할 나라의 세상이라도 이런 적은 없었습니다. 이들은 이러고도 만족하지 못해서 국고의 물건까지 다 훔쳐내니 비축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나라꼴은 말이 아니게 되었으며 도성에는 도적들이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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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그뿐인가 느닷없는 도발로 경제 전쟁중인 왜국의 진면모를 앞서 파악하고 경계하라 일렀으며 토착왜구의 준동을 예견하셨으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섬 오랑캐가 난리를 일으키고 있다. .... 아무런 까닭 없이 남의 나라 장수를 죽이고, 나쁜 마음을 품고서 우리 임금의 위엄을 모독하였다. 제포를 자신들에게 돌려달라는 것은 조정의 의사를 시험하는 것이고, 대장경을 30부 인출해 가겠다는 것은 반드시 얻고자 함이 아니라 우리를 한번 우롱해본 것이다. 손뼉을 치면서 뺨을 튀기거나 지팡이를 잡고서 눈을 부라리며 "반드시 네 모가지를 뽑아버리겠다(必拔爾之項)"고 말하면 비록 삼척동자일지라도 그것이 공갈하는 것인 줄 알게 된다. 헌데 당당한 우리 조정에서는 재상과 장수들이 대책을 마련해야 함에도 저들의 허세에 벌벌 떨면서 어떻게 할 줄을 모르고 어찌 “상중이어서 정사를 논하지 못한다”고 거짓 핑계를 대고 있는가? 이런 때에 적을 제압하자는 주장도 적의 공격을 막는 계책도 없단 말인가. 송의 한기(韓琦)처럼 (서하의) 조원호가 보낸 사신의 목을 도성 문밖에서 베기를 청하지는 못할지라도, 세상을 어지럽히는 도적에게 예물을 주라는 명을 내리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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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에 성리학의 거두로서 어깨을 나란히 했던 온후한 문사기질의 퇴계 이황과는 다르게 남명은 다분히 상무적인 기질을 보였다. 퇴계가 이론에 치중했다는 남명은 실천에 주목했으니 그 행동거지 또한 퇴계의 행동거지가 조심스럽거나 신중한 태도를 보였던 반면 남명의 행동은 분명하고 단호하였다. 같은 학자였음에도 퇴계가 벼슬을 하면서도 현실정치의 비판에는 가급적 거리를 뒀다면, 남명은 자신의 출처관에 따라 벼슬은 멀리 해도 현실정치의 비판에는 앞장서는 태도를 보였다. 그의 이같은 학풍이 제자들에게 계승되었고 그들의 활약이 국란을 극복하는데 일조했음은 물론이다.
책상물림으로 사사로운 이익으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정치에 참견하려드는 지금의 식자층이 뼈저리게 새겨야 할 말을 남명은 앞서 남겼다. 그는 퇴계와 기대승간의 사단칠정 논쟁에 가세한 설익은 유생들을 가리켜 이황에게 보낸 편지를 보낸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도리어 남에게서 사기나 당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치니 아마 선생같은 어른이 꾸짖어 그만두게 하시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같은 사람은 마음을 보존한 것이 황폐하여 배우러 찾아오는 사람이 드물지만, 선생같은 분은 몸소 상등의 경지에 도달하여 우러르는 사람이 참으로 많으니 십분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겠습니까? 삼가 헤아려 주십시요"
ㆍ ㆍ ㆍ 참으로 선인의 지혜가 놀랍고도 위대하다. 어찌 작금의 사태를 예견하고 이토록 절절한 말씀들을 남겼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후손으로서 부끄럽다. 옛말에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금수만도 못하다했는데 금수(禽獸)가 활개치는 세상이다.
사람답게 살아야겠는데 무엇을 새긴 칼을 차고 다녀야 할지 고민해봐야 겠다.
덤으로 남명 조식의 본관은 창녕이니 우연히도 조국은 남명의 문중 사람이다. 물론 이 글 내용과는 무관하다. Believe it or n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