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에서의 13분

소통과 교감

by 문성훈

실날같은 비가 내리는데 어둠은 이미 내려앉았고 도시는 잠이 들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분명 오래전 수없이 오간 거리일텐데 운전대를 잡고 스쳐지나던 기억 속에 장소와 버스를 갈아타려 내린 정류장은 낯설고 생경한 풍경이다.

정류장에는 아가씨 한 사람뿐이다. 어둠 속에서도 아가씨인지 아줌마인지 쉽게 분간이 되는 것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어 그 빛이 얼굴을 확연히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빌딩은 육중한 몸을 어둠에 숨기고 날선 눈으로 쏘아보는데 사람만 어쩔 줄 모르고 죄지은 사람마냥 고개를 숙이고 있다.

스마트 폰을 켰다. 몇 번 버스를 타야할지 네비게이션 앱을 작동한다. 정류장 전광판을 올려다 본다. 13분 있으면 나를 집으로 데려다 줄 버스가 온다. 아가씨는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고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무런 대화도 필요치 않고 관심을 기울여서는 안될 것만 같은 두 사람이 정류장이라는 좁은 장소에서 각자 각기 다른 장소로 데려다 줄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아마 그녀의 목적지는 집일 것이다. 그마저도 시간을 가늠해서 하는 짐작에 불과하다.

13분이라는 침묵하고 있기엔 길고 얘기를 나누기에는 짧은 시간동안 나는 '소통'과 '교감'이란 화두를 두고 혼자만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넓은 도로를 눈 앞에 두고 거대한 빌딩에 둘러쌓인 채 옹색하리만큼 비좁은 공간안에 있는 두 사람간의 거리는 또 왜 이다지도 먼 것일까.
사람간의 거리를 행성간의 거리만큼이나 멀게 만든 것은 원하기만 한다면 무엇이건 가능하게 해주는 문명의 이기(利器)때문이기도 하고 삭만하고 메마른 도심 공간이 주는 황량함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비 그친 다음 날 말라비틀어진 채 죽은 지렁이마냥 팍팍한 삶에 찌들린 채 자신만의 담장을 높이 쌓지않으면 지킬 수 없을만큼 나약한 존재가 된 인간이 되어버려서 일 수도 있다.

만약 스마트폰이 터지지 않고 휘영청 밝은 달빛이 두 사람의 윤곽을 그려내는 시골의 한적한 정류장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루에 몇 번 오가지 않는 허름한 버스를 기다리며 풀벌레 소리는 멈추고 개구리 울음소리만 들리는 야트막한 산 사이로 난 좁은 길이라도 그랬을까?



훌쩍 떠난 섬에서 늦은 저녁 버스를 기다린 적이 있었다. 노선은 하나 뿐이니 전광판은 물론 녹슨 안내판조차 필요 없는 정류장에 혼자 서 있었다.
사람이 그리웠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찾아 와 주길 바랬다. 뻔한 질문이지만 "이 섬에 사십니까? " 버스는 OOO로 가는 거 맞죠?"라고 물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운이 좋다면 "아... 거기보다는 우리집에 빈 방이 있으니 같이 갑시다"라는 친절에 내심 쾌재를 부르거나 "우리 섬에는 OOO가 정말 볼 만합니다. 꼭 가보십시오"라는 인터넷으로는 알 수 없는 소중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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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손안에 쥔 스마트폰 앱 덕분에 작은 점빵에 들러 길을 물어 볼 필요도 없고, 행인을 붙잡고 몇 번 버스가 얼마만에 오는지 알아보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저장된 번호만 누르면 외국에 살고 있는 친지조차 무시로 어느장소에서든 불러올 수 있고 전혀 모르던 분야의 지식이나 정보도 인터넷 검색으로 몇 초안에 알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다.
과연 문명이 인류의 행복을 가져다 주기는 하는 것일까?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투명한 벽이 있다. 그것이 안보이는 거미줄 같은 전파이건 변질된 인간의 정서이건 존재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살갗을 부비고 눈을 마주보는 직접적인 소통은 점차 사라져 간다.
주고 받는 대화를 손가락이 대신 해주니 고저장단의 운율과 감정은 실어나르지 못하면서 퍼석하고 깡마른 의사만 전해줄 뿐이다.
눈과 귀로 보고 듣는 사람과 그들의 얘기는 이미 덧칠해졌거나 정제되어 있고 필요에 의해서 왜곡되고 거세되어 있다.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눈은 가리워졌고 진실을 들을 수 있는 귀는 어두어졌다. 사유와 성찰이 필요한 뇌는 그마저도 컴퓨터가 대신해주니 멈추고 버벅거린다.

우리는 편리함에 중독되고 게으름에 익숙해져서 점차 놓쳐서는 안되는 진짜를 외면하고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산다.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만이라도 잊어선 안되지 않을까?


도심의 넓은 도로는 기계가 뚫고 다져서 만든다 시골길은 사람이 지나다니며 발로 다져서 만들어진다.
길은 관계의 흔적이고 소통의 결과로 생겨나는 주름이다.

머릿 속 주름마저 펴지는 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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