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토와 불가사리의 연관성

by 문성훈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럽고 미세먼지 낀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최근들어 젊은 사람들로부터 "진정한 멘토는 없는가"라는 탄식 묻은 하소연을 듣게 된다.
오디세우스의 일화에서 유래한 '멘토'는 지혜와 덕을 갖춘 스승이자 어버이같은 존재로 신뢰와 존경을 받칠만한 인물을 일컫는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속에서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서 멘토를 간구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는 얘기는 그만큼 희소하다는 말이기도 한다.

어느 해인가 학생에게서 "제게 멘토같은 분이십니다"란 말을 들었다. 웃으며 말했다. "고맙긴한데 과연 어떤 면이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다. 차라리 니가 누군가의 멘토가 되는 게 더 빠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맏이로 태어났다. 아래로 두 동생이 있는데 윗자리 역할을 어찌해야할 지 모르고 성년이 됐다. 신설학과로 대학을 들어가 앞선 발자욱없이 좌충우돌하다 졸업했다. 취직을 하고도 내 미래상이 안보여 무작정 사업에 뛰어들었다. 쓴물 단물 삼키며 고군분투중이다.
그 세월동안 내게는 뚜렷한 멘토가 없었다. 굳이 있다면 그 과정에서 조합된 '프랑켄쉬타인'같은 가공의 인물이 있다. 수많은 인연과 책을 통해 만들어 낸 그 인물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서 "저는 멘토가 ooo십니다"란 얘기를 들으면 잠깐 아찔해지는 기분이 든다. 지뢰를 밟고 서 있는 사람을 대하는 느낌이랄까. 내가 아는 한 인간은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인 채 착각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일생을 통틀어 누군가의 멘토가 될만한 사람은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성인조차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카톨릭 신자가 되면서 세례명을 받았다. 본명이 될 성인의 삶을 살펴보니 마뜩잖았다. 그 빈한하고 고달픈 생애가 내 것처럼 느껴졌다.
"신부님. 왕이나 부자로 호의호식하며 살다가 만인의 우러름을 받으며 평안히 분을 감으신 성인은 안계십니까? 저는 그 분의 이름을 받고싶습니다"
"그렇게 사신 분은 성인 중에 안계십니다. 그렇게 사셨다면 성인의 반열에 못오르기도 하셨을겁니다"
치기어린 욕심이었지만 성인의 삶에서조차 완벽한 귀감을 찾을 수 없는데 현세에서 그런 한 인물을 찾는다는 것은 사막을 헤매며 신기루를 쫒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달리 고개를 돌려보면 세상에는 멘토가 넘쳐 난다.
과거 입사지원을 했던 젊은 친구는 전직장 사장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다. 그 사장은 사기꾼이라고 했다. 그래서 무엇을 배웠냐고 물으니 "새벽부터 밤까지 제가 지켜 본 그 어느누구보다 부지런했습니다. 사기를 치는 것도 부지런해야하는구나를 배웠습니다"라고 했다. 최소한 그 사장은 그에게있어 성실과 근면의 중요성를 일깨워 준 멘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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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과 인용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짜깁기로 책을 펴내고 수완좋게 출판사업을 일으킨 '신영준'이라는 자가 있다. 그가 천재라고 칭송하는 '고영성'이라는 동업자도 있다.
바람직해보이지않는 수단과 매스컴의 허점을 이용해 출판계를 잠식하는 그들에 맞서 레지스탕스처럼 활동하는 사람들이 모여 '도서사기감시단'이란 모임을 만들었다. 치열한 공방이 오가고 있지만 그 끝이 어딜지 결말이 어떻게 될 지는 모른다.

'신영준'이라는 자는 청년의 멘토라 불린다. 그를 따르던 많은 젊은이들이 차츰 드러나는 빈약한 자질과 치졸한 행태, 윤리적 무감각에 실망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본다. 냉정하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실망한 사람들이 신영준을 비난하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그 잘못이 신씨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상을 세우듯 신영준을 그 자리까지에 올린 것도 그들이고 그에 일조한 것도 사실이다.
차라리 이전처럼 신영준을 또다른 '멘토'로 여기는 것이 본인과 사회를 위해서 나은 방향설정이다.

내가 보기에 신영준은 불가사리같이 인물이다. 조개양식장을 망쳐놓고 성게를 잡아먹는다고해서 어부들이 넌더리를 치며 싫어하지만 불가사리는 불가사리 본연의 생태에 충실한 것 뿐이다. 낚시바늘에 꿔여져 올라온 불가사리에게 욕을 퍼붙고 양식장을 덮친 불가사리를 그물로 건져올려 방파제에 말려 죽인다한들 불가사리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하물며 한국 출판계에서 신영준, 고영성 두 사람을 몰아낸다고해서 말끔하게 정화가 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래도 그 해악이 번지는 것만큼은 막아야한다. 어부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다행이다.

다리 몇개쯤 떼어내도 다시 재생되고 살아나는 불가사리의 근성과 생존력에 주목했으면 한다. 느린 걸음으로 쫒아가 가시에 찔리면서도 성게를 잡아먹는 불가사리의 근성만큼은 배워야 한다.
해악을 끼친다고는 하지만 오대양을 훑어 불가사리를 지구상에서 사라지게는 할 수 없다. 전 세계 바다에는 그보다 더 해로운 생물이 살아가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구분은 인간이 할 뿐이다. 정작 잡아먹히는 존재는 고통도 없고 원망도 하지 않을 지 모른다.
신영준도 멘토가 될 수 있다. 그의 처세술, 끈질긴 근성, 사업추진력만큼은 배울 수 있으니 자신만의 '프랑크켄쉬타인 멘토'의 피부 한 조각은 되고도 남음이 있다.
다만 '무엇'을 위한 처세술이고 근성인지는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에게는 없는 도덕률, 철학, 인생관을 갖춘 인물에게서 나머지 조각을 찾는 데 게을러서는 안된다.

아울러 세상 사람들 식단에 오를 조개와 성게알을 불가사리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양식장과 연안에서 눈을 떼지 않는 등대 '도서사기감시단'의 불빛이 꺼지지않기를 바란다.




조심스럽지만 자신만의 프랑켄쉬타인을 만들어가라고 권한다.
멘토를 찾기 전에 멘토를 보는 눈부터 밝게 해야 한다. 책읽기는 그 좋은 방법 중에 하나고 여행과 노동도 그렇다. 앞선 이의 경험을 읽고 세상과 부딪혀 체험을 쌓으면 눈이 떠진다.
내게도 글쓰기와 지식, 세상을 보는 눈을 닦아주는 멘토가 있다. 한 인물에게서 완벽한 멘토상을 구현하느니 지식전달자로서의 멘토, 인격수양을 위한 멘토, 사업성공을 위한 멘토를 선정하는 편이 수월하다.
모든 면이 완벽할 수는 없어도 어느 한 분야에서는 당신을 이끌 멘토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누군가의 멘토 한 조각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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