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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Oct 20. 2019

新레지스탕스

" 내가 생각하는 건 이런거야 여기에 문이 이런 식으로...." 슥슥 그려나간다.
지켜보던 조카가 "와아 삼촌 정말 그림 잘 그리시네요. 라고 한다.

녀석은 의형제나 다름없는 형님의 아들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중학생이었는데 어느덧 내년에 장가를 간다.
형님 건물 한층 일부를 인테리어 하는 중인데 녀석의 사무공간도 포함되어있다보니 관심이 많다. 나는 가방에 둥글게 말린 트레이싱지를 가지고 다닌다. 디자인을 구상하거나 설명해야 할때 두루마기처럼 펼쳐놓고 연필로 그림을 그린다. 그러고보니 오랜세월 녀석에겐 항상 짖꿎고 장난치기 좋아하는 삼촌이었을 뿐이다.

요즘은 도면과 물성까지도 사진처럼 그려내는 컴퓨터덕에 인간의 수고로움을 덜었다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로 잰듯 어김없이 그려지는 화면상의 그림은 왠지 죽어있다. 선 하나하나가 시신처럼 늘어서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살짝 휘어지거나 농담이 다른 손으로 그은 선은 살아있다. 저마다 이유를 가진 채 꿈틀댄다는 느낌이 있어 좋다. 그 위에 덧그린대도 밑에 깔린 선이 묻히진 않는다. 오히려 그 존재감이 살아날 때도 많다.

나는 머릿 속 생각을 종이에 옮기기를 좋아한다. 극히 아날로그적이다. 감히 예술작품이라며 남에게 내밀 수는 없어도 내가 보기엔 완벽히 제본된 어떤 도면보다 훌륭하다.

새로 입사한 직원에게 간단한 과제를 주고 도면을 그려보라고 하면 으레 컴퓨터를 켜고 모니터부터 연다.
주어진 치수대로 그대로 옮기는 작업이 끝나면 그제서야 멍하니 화면을 응시하거나 인터넷 검색을 한다. 유사한 사례나 이미지를 찾기 위해서다. 이 과정을 지켜보는데는 적잖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이윽고 그(그녀)를 불러서 묻는다.
"잘 돼가니?"
"아직...잘 모르겠어요"
"더 시간이 필요해?"
"어디서부터 해야할지..."

"넌 디자이너가 되고 싶니 오퍼레이터가 되고 싶니?"
"네?... 디자이너요"
"나도 그래 널 디자이너로 채용했으니까... 니가 헤매고 있는 건 처음 시작부터 잘못됐기 때문이야"
"네?"
"내가 너에게 과제를 줄 때 너는 질문이 없었어. 너는 클라이언트를 만나보지도 않은 상태인데 그 사람에 대해서 그의 바램이나 요구에 대해서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얘기지. 그리고 넌 컴퓨터부터 켰어. 너의 생각이나 구상이 정리되지도 않았는데 컴퓨터가 무언가 말해줄 것처럼..."

대개의 신입사원들은 저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비슷한 과정을 밟는다.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신체를 일부처럼 여기는 것도 책보다는 웹진이나 웬툰에 더 열광하는 것도 알고보면 즉시 답을 구할 수 있고, 빠른 결과를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오류와 의문을 허용하지 않으니 사고의 진전이나 깊이있는 사유는 필요없다.

이제 우리 주변에 널린 문명의 이기들은 속도와 편리함 그리고 정확성을 무기로 인간을 부린다. 앞서 결과를 예측하게 해주고 그 과정에 인간의 참여를 허용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두뇌활동을 넘어서서 그 밑바닥에 가라앉은 감성과 감각으로 승부하는 분야에서마저 컴퓨터가 다음 과정을 지시하고 인간이 수행하고 있는데 익숙해져가고 있다.

비교적 간단한 체스에 이어 무한에 가까운 수가 있어 불가능하다 여기던 바둑에서 알파고가 인간을 이긴 지는 오래다.
하지만 AI가 인간과의 대국에서 이겼다고해서 바둑판에서 우주를 그리고 인생을 연상하지는 않는다.
인터넷을 통해 쉽게 레시피를 구할 수는 있어도 오래전 미뢰에 새겨진 그 맛과 추억을 구현해내지는 못한다.
컴퓨터가 있었다면 첫사랑과의 첫 스킨쉽이 가져온 심장박동수와 혈류량을 그래프로 정확하게 그려 낼 수는 있겠지만 그녀의 팔뚝에 난 솜털이 내 손바닥을 간지럽히던 감촉을 그 무엇으로도 영원히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가끔  0과1로 무엇이든 재단할 수 있는 디지털 세상에서 아날로그로 싸우는 레지스탕스같다고 느낄 때 사는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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