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을 볼 기회를 가졌다.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을 무지랭이에 가까운 내가 감히 평가할 수는 없으니 세속적인 잣대에 기대어 보면 4000억원을 호가하는 작품을 눈앞에서 본 것이다. 나와 그 사이에는 얇은 유리 한장, 늘어진 줄 한오라기조차 없었다. 188cm 부서질듯 앙상한 몸뚱아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아우라에 짓눌려 숨쉬기조차 버거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처럼 힘차게 내딛는 발걸음이 거죽을 떼어내고 무덤에서 걸어나왔거나 혹은 용광로에서 모든 걸 덜어내고 나온 듯한 모습에 무한한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작가 김훈 선생의 글은 자코메티의 작품을 닮았다.
무엇하나 덜어 낼 것 없이 간결한데 강렬한 인상을 남기면서 문장 하나 하나가 살아 꿈틀댄다. 거칠고 위태로웠던 지난 삶이 녹아내려 끊임없이 맨 몸으로 부딪히는 현실에서 말과 글로 쏟아져 나오는 것만 같다.
그는 젊은 시절 절망의 끝에서 만취한 다음날 아침에 눈 슬픈 똥에 대한 얘기를 한다.
"똥의 모양새는 남루한데 냄새는 맹렬하다. (…) 간밤에 마구 지껄였던 그 공허한 말들의 파편도 덜 썩은 채로 똥 속에 섞여서 나온다. 똥 속에 말의 쓰레기들이 구더기처럼 끓고 있다. 저것이 나로구나. 저것이 내 실존의 엑기스로구나"
기자시절 시집 기사를 쓰기위해 백번을 읽었고, '태백산맥'기사를 쓸 때에는 전 편을 세 번 정독할만큼 치열한 삶을 살았던 그다.
내게 있어 글쓰기는 현실과의 사투에서 남겨진 부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도피행각에 가깝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도 몸으로 밀어 쓰는 글은 어쩌면 똥밭에 함께 뒹굴고 싶지 않는 오만함의 발로이거나 거기서 헤쳐 나올 수 없는 것만 같은 좌절감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꾸준했던 모임들에 얼굴을 내민지도 오래다. 그즈음부터 책을 가까이 했는지 글을 먼저 쓰기 시작했는지는 모른다. 가슴 뛰지않는 만남을 줄이니 나와 대면하는 시간이 늘었다. 말보다는 글로 남기니 오해의 소지도 덜었다. 직설적이고 거침없다보니 지나온 날들의 많은 시간을 한발 앞서 뱉은 말을 거둬 들이느라 혹은 설명하느라 허비했다. 그동안 정작 만나야 할 사람, 직접 찾아보고 알아야 할 것들은 놓치고 살았다. 그렇게 내가 깎여나가고 있는 것을 모르고 지냈다. 사람은 시간에만 깎여나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상처받는다지만 실은 깎여나가는 것이다.
온전히 자신을 지키지 못하면서 덜어내는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간의 흐름에 자연히 풍화되기 마련인데 나를 쌓거나 세우지 못하면 사막의 모래처럼 바람에 밀려다닐 것이 분명하다. 그래야만 더이상 걷어낼 것이 없는 단순한 삶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사막이 되기보다는 베두인으로 살고 싶다. 뼈마디에서 뿜어져 나오는 삶의 역동성이 '걷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고, 사색을 하며 글로써 말을 대신한다고 그렇게 세상에서 한발 물러서 있는다고해서 세상의 오해가 불식되고 단순한 삶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거들 뿐이다. 방향을 일러주지만 함께 걷지는 않는다. 지식과 지혜는 분명 다르다. 지식이 많아 괴로운 사람은 있어도 지혜가 넘쳐 잠 못드는 경우는 없다. 발길에 채일 만큼 세상에 널린 지혜를 줏어모아야겠다. 허상이 아닌 현실의 땅을 밟고 책보다는 삶을 통해 배운 것들이야말로 지혜다.
능력이 미친다면 일상의 구체성을 담아 글로써 나누려고 한다. 조심스럽지만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걷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그렇게 현실에 몸을 담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