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안에서 전화벨이 울리면 난감하다. "네. 알겠습니다. 곧 전화드리죠. 제가 지금 버스 안이라서요..." "응. 버스안이야. 가는 중이고... 그건 문자로 얘기하자" 어떤 날은 서로 짜기라도 한듯 연이어 전화가 온다. 대부분 '곧 연락드리겠습니다'라는 문자로 답을 하지만, 어려운 사람의 전화거나, 급박하게 돌아가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일 때는 조급증이 생겨 손으로 틀어막고서라도 죄인처럼 조심스레 받는 경우가 있다.
오늘이 그랬다. 장마라더니 장하게 오는 비도 아니고 그래선지 버스 안 승객은 2~3명이 고작이다. 문자로 대화를 하다보니 벌써 환승할 정거장이다. 가방과 우산을 챙기고 황급히 내렸다. 버릇처럼 바지주머니도 더듬는다. 언젠가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흘리고 내렸었다. '음. 이상없군' 길을 건너 갈아 탈 버스 정류장의 전광판을 들여다보는데 뭔가 서늘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이내 쨍하고 유리잔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아뿔싸... 이런 멍청한...' 벙거지 모자를 두고 내렸다. 재작년 큰 맘먹고 산 천연소재로 짠 무척 아끼던 것이다. 하필이면 오늘따라 벗어서 앞좌석 창가의자 모서리에 걸쳐뒀다. 평소 그런 적이 없었는데 무슨 생각에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잠시 멍해졌다가 어찌할까 골몰했다. '택시를 타고 쫓아갈까? 아니야 택시 잡는데만 한참 걸릴 수도 있어' '어차피 영원한 건 없는 거니까... 잊어버리자' '아냐. 아끼던 건데...버스회사 유실물 센터로 가면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종점까지 그대로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스마트폰으로 버스노선을 찾아봤다. 내가 내린 곳에서 여섯정거장을 거쳐 회차한다. 그러면 내가 내렸던 정거장 건너편 즉 지금 서있는 정거장으로 돌아온다는 계산이 섰다.
기다려보기로 했다. 운이 좋다면 되찾을 수도 있다. 어릴적 아카시아 잎사귀를 뜯으며 놀던 기억이 떠올랐다. '있다, 없다...있다, 없다... 있다, 없다' 그렇게 머릿속에서 아카시아 잎사귀를 뜯다보니 기다리던 9707번 버스 한 대가 온다. "기사님. 제가 버스에 두고 온 물건이 있어서... 한번 살펴보고 내리겠습니다" "네" 이럴수가....없다. 좌석 밑까지 훑었는데 없다. "감사합니다" 내려서 또 생각했다. '이 버스가 아닐 수도 있어. 다음 버스를 기다려보자" 다시 이파리를 뜯었다. 마침내 또 버스가 도착했다. 같은 멘트를 하고 버스에 올랐다. '와우~!' 멀리서도 내가 뒀던 그 자리에 모자가 보였다. 내리는데 "감사합니다"란 인사가 절로 두번 나왔다. '다시는 구겨지는 한이 있어도 벗어두지 말아야지...'
얼마전 아까운 한 사람이 떠났다. 이전에도 그랬다. 그래도 떠난 사람의 못다이룬 여망은 쉬이 이루어질 기미가 안보이고, 남은 사람의 간절한 바램은 아랑곳하지 않고 세상은 더디게만 바뀌고 있다. 세상살이가 다 그런 것 아닌가? 잊고 내린 모자처럼 운좋게 다시 찾을 수도 있고, 영원히 잊어버릴 수도 있다. 첫번째 버스에서 낙심해서 자리를 떠났다면 시간만 버린 셈이 됐을테고, 설사 탔던 버스에 올랐더라도 누군가 집어갔을 수도 있다.
그런데 분명하게 새겨야 할 교훈은 있다. 예기치않은 사건, 사고를 맞이하더라도 버스 노선을 검색하듯 나아가야할 방향을 잃지않도록 나침반을 들여다 보는 지혜는 가져야 한다. 다가올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며 아카시아 잎을 떼듯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기다리는 인내심없이는 아무런 성과를 바랄 수도 없다.
우리가 기다리는 버스에 간절하게 바라던, 혹은 잊어버렸던 소중한 무엇이 있을 지 없을 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방향감각을 상실하지 않고 차분히 기다릴 줄 모르면 그런 기회조차 가질 수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누구도 확신하지 못할 사건, 지나간 버스에 물건을 두고 내렸다면서 허둥대고 분을 못이겨 고함지르고, 난리법석을 떤다고해서 이루어질 것은 하나도 없다. 지금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 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