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바꾸는 세가지 방법은 공간, 사람 그리고 시간을 바꾸는 것이다.' - 오마에 겐이치
우연인지 행운인지 나는 공간을 바꾸는 게 직업이고, 경력이 쌓이면서 주어진 시간에 상당부분을 내가 좋아하는 일 가령 책읽기나 글쓰기, 여행에 할애할 수 있게 됐다. 다만 최근들어 의도적이지는 않아도 의뢰자을 상대해야만 하는 직업이다보니 다양한 직업, 연령, 성격을 가진 사람들을 만난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됐다. 가령 건축주인 의뢰자들은 대개 고학력에 지위가 높거나 평균 이상의 부를 가진 사람들로 한정되어 있었고, 나와 작업을 같이하는 작업자들은 대부분 저학력의 지위라고는 내세울게 없는 수입이 일정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이 두 부류를 오가며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고 할 수 없고 사적인 관계 역시 같은 고향, 비슷한 의식과 학력 수준의 사람들로 채워져 있는데다 변화도 거의 없다.
그런데 나는 왜 과거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 착각을 했을까? 이런 일종의 오만한 생각을 했던 건 나 역시 자기 중심적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지극히 정상적이며 상식적인 삶을 지향하고 살고 있다고 자부했고 누구보다 다양한 경험과 사람을 만나고 있다고 스스로를 속인 것인지도 모른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는 이러한 욕망은 '관계 편중성'에 의해 확대 재생산된다고 한다. 누구나 가까운 주변 인물들을 꼽아보면 비슷한 성향과 지적 수준, 재산 정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보면 부지불식간에 자신은 지극히 상식적이며 보편타당한 사람으로 착각을 하게 되고 모든 사리판단의 기준을 자신으로 삼는데 주저하지 않게 된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갔다. 자대배치를 받고 가장 놀랐던 건 40명 가까운 내또래 내무반 동료들 가운데 4년제 대학을 다니다 온 병사가 단 2명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왜 이전까지 10명중에 8~9명은 대학을 간다고 착각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내 형제와 가까운 친구들 중 어느 누구도 재수를 했을망정 대학 진학하지 않은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촌형의 처가는 부자였다고 했다. 그런데 그 많은 재산을 4번의 국회의원 출마로 탕진했다고 했다. 왜 그런 오판을 4번이나 했을까?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서 이번에는 된다고. 당신이 안되면 누가 되겠냐고 부추긴 결과였다. 지지자들이나 이해관계에 얽힌 사람들에 둘러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 편중성'은 지리적 편중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예컨대 소득 하위층은 달동네에 모여살고, 부자들은 부자들이 모여살게 된다. 내 사무실이 위치한 홍대 주변 지역, 연희동과 서교동, 동교동은 과거 고위관료나 공직자들이 원주민이었다. 어느덧 상권이 형성되고 지가가 오르면서 손바뀜이 일어나 지금 대부분의 건물주는 부동산 가치상승과 임대료 수익을 바라는 강남 거주자들이고 임차인들은 중소 영세상인에서 프랜차이즈로 대표되는 기업으로 변모됐다. 그래서 과거 원주민인 건물주와 반지하 소상공인 간의 신뢰와 끈끈한 유대감은 어느덧 계약서와 법률에 의존하는 냉엄한 갑과 을의 관계가 정립됐다. 양떼와 목동의 초원이 약육강식의 정글로 변모한 것이다. 이제는 오래된 허름한 카페에서 단골이 찾아와 역시 임차인인 주인과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없다. 대신 밤을 기다리는 클러버들과 언제든 새롭게 들어선 가게로 옮길 준비가 된 유동객이 점령한 동네가 됐다. 거기에 '인간' '공존' '관계' '애착''의미' '철학'이 끼어들 여지가 있을리 만무한다. 그 자리를 '이기심' '탐욕' '방관' '쾌락''유흥'이 차지했다.
이렇듯 '관계의 지리적 편중성'은 필연적으로 '의식의 편중성'을 유발하게 된다. 부자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달동네로 이사가지 않듯, 달동네 사람이 부자동네에 사는 경우는 드물다. 유학생들은 귀국해서도 유학생 출신들과 교류하고 고졸자가 대졸이상의 고학력자와 한 공간에서 오래도록 교류하는 예는 흔치않다. 부자, 고위직, 고학력자들과 평생을 어울려 산 사람은 제 아무리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고 해도 편중될 수 밖에 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위 공직자가 민심과 이반된 정책결정을 내리고, 교수나 학자가 구름위를 산책하는 공자말씀을 읊는 이유다.
이러한 '자기중심적 사고'와 '관계의 지리적 편중성'이 결합하면 일반인의 상식과 양심, 도덕율로는 용납하기 힘든 언행을 서슴없이 하게 된다. 강남 주민이 공공연하게 임대아파트를 결사반대하며 입주자를 업수히 여기고 경비원을 하인취급하는 예가 그러하다 . 과거 나는 대치동 타워팰리스에서 또래들과 함께 놀던 자신의 아이를 불러 "저 아이는 ㅇ동 사니까 같이 놀지마"라고 하던 젊은 엄마를 본 적이 있다. 같은 타워팰리스지만 평수가 작은 동에 사는 아이라는 이유였다. 나는 그 젊은 엄마보다 그런 얘기를 듣고 자란 아이가 미래 세대라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적어도 내 아이보다는 많은 부를 물려받고 훨씬 앞선 출발점에 설 거라는 사실 때문에 불쾌함을 넘어선 애비로서의 죄책감도 맛봤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의 나는 '의미'보다는 '비교'에 몰두하고, '관계'보다는 '돈'을, '경험'보다는 '소유'를 갈망하는 물질주의자들의 영혼은 언제나 허기져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이후로 평온하다. 최근에는 태영호가 력삼동 국회의원이 되면서 '자기중심적 사고'와 '관계의 지리적 편중성'을 뛰어넘는 '이기주의'와 '물질주의'가 어떻게 인간을 타락하게하고 무지몽매하게 하는 지도 목도했다.
내가 지향하는 '격조있는 삶'은 관계의 편중성이 가져오는 의식의 변질을 우려하고,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삶이다. 작든 크든 '공간'을 바꾸는 일을 하면서 더 다양한 경로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내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성찰하는데 소홀하지 않으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