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의원과 병원프로젝트를 해봤지만 그런 말을 하는 의사를 만난 건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이다. 나는 영업에는 젬병인 사람이다. 어떤 연유에서건 한번 맺어진 인연이면 고맙게도 계속 맡겼고 주변에 강권하다시피 소개해줬기에 그나마 연명을 한다.
그런데 그 일은 대리석공사를 하는 협력업체 사장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자신이 작업에 들어간 의정부의 어느 건물에 큰 의원이 들어서는데 나를 소개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리 큰 기대를 하지않고 약속 장소로 갔다. 그런데 나 말고도 세 업체가 더 있었다. 분양업체에서, 건설업체에서 소개를 받았다고 했다.
마침내 그 의사가 도착했다. 사람좋은 인상의 그는 왠지 맨손만 연신 부비는 품이 뭔가 당혹해하는 것 같았다. "실은... 제가 인테리어 회사를 소개해주십사 주변에 부탁을 드리긴 했는데... 이렇게 여러 업체일 줄은 몰랐습니다. 어째야 할지...." 이유는 알겠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제가 네 업체에게 시안을 받아보고 정하는게 어떠실런지요?" 나를 제외한 세 업체는 당연하다는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제가 한군데를 지정하면 다른 세 군데 업체도 작업하신 게 있는데 어떻게 사례를 해야 할까요?"
업체 중 젊어보이는 사장이 호기롭게 대답했다. "뭐 그러실거 없습니다. 다 그렇게 하는데요 뭘...."
나머지 업체도 동의하는 투다. 가만히 듣고있을 내가 아니다. "아닙니다. 그래선 안되지요. 채택이 안된 세 업체도 시간과 공을 들인건데 마땅히 소정의 사례를 하는 게 맞습니다. 그럴 수 없다면 저는 빠지겠습니다" 다른 업체 사람들은 마치 내가 산통을 깨뜨렸다는듯이 의아하게 쳐다봤다. 나는 '디자인을, 인테리업계 업계를 흐려놓은 건 당신들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야..'라는 말을 뱉을 뻔 했다.
"자~ 자... 그럼 제가 여러분께 현장을 안내하고 다른 요구사항이나 필요한 내용은 서면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거기에 채택이 안된 분들께 제가 제시할 사례도 명시하겠습니다. 그러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같은 날 네 업체는 빠짐없이 프리젠테이션을 했고 우리 회사 안이 채택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가 말했다. "실은 첫 미팅에서 사장님을 마음 속으로 낙점했더랬습니다. 아... 오해는 마시고요. 시안도 물론 제일 마음에 들었고요" "왜 처음부터 낙점을 하셨는데요?" "뭐랄까... 프로같으셨거든요. 디자인 비용 그 말씀하실 때... 소신도 자부심도 있으실 것 같아서 시안이 기대가 됐었습니다. 하핫"
그는 서울대 출신의 내과의사였고, 경영에 대한 철학도 남달랐다. 작은 의원을 근처에서 하고있다가 이번에 새 빌딩 한층을 분양받아 확장을 하는 것이었다. 월급을 주는 의사만도 5명이었다. 주위 평판도 아주 좋았다. 그 이유는 나중에 알게됐다. 병원은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환자의 공간이다. 그런데 의사나 환자의 요구보다는 아무래도 항상 활동범위가 넓고 할 일이 많은 간호사의 의견이 많이 참작된다. 내가 수간호사와 많은 얘기를 나누는 이유다.
이 병원에도 개원당시부터 같이 한 터줏대감격인 수간호사가 있었다. 친해지면서 허물없이 사담도 나눌 정도가 됐을 무렵이다. " 그런데 이원장님실은 따로 안만드는데...직접 진료 안보세요?" "보시죠. 그런데 다른 분들 쉬실 때나 일주일에 한 두번... 꼭 이원장님만 찾는 환자분들이 계셔서.... 요일을 정해서 아무 진료실에서 보시면 된다고 하셔서요" "그렇군요. 저는 항상 나오시는 줄 알았는데..." "그러면 안돼요. 우리 병원 망해요. 이원장님은 자주 안나오실 수록 병원 운영에는 더 좋아요" "네? 왜요? 이원장님만 찾는 환자가 많다면서요" "그게요. 이원장님은 진료를 오래보시거든요. 한 환자를 보는데 30분이상 걸릴 떄도 있는걸요. 할머니환자는 손주얘기까지 다 들어주시고... 환자들 생활습관, 식단까지 챙기시니까요. 이원장님 진료하는 날은 처방도 안나와요. 감기환자에게는 "약 안드셔도 된다. 따뜻한 물 많이 드시고 푹 주무셔라..." 주사도 잘 안놓게 하시고... 아무튼 뭐 병원 수입에는 안좋죠" "아... 네...."
우리는 병원이 개업하고도 주기적으로 만나서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가 됐다. 각자의 인생관, 세상을 보는 시선 그리고 신변잡기까지 밤이 새는 줄 몰랐다. 그러다 한동안 소식이 뜸하더니 새로 병원자리를 알아본다는 연락이 왔다. 이전에 새 건물을 분양받으면서 무리하게 빚을 낸데다 많은 인원에 비해 운영이 잘 안되어서 정리할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성남의 어느 빌딩을 임대해서 의원을 다시 열었다. 물론 내가 인테리어 공사를 맡았다. 최소한의 공사비를 들일 수 있게 했는데도 자금이 여의치않은 눈치였다. 독촉하지 않았다. 그렇게 개업을 했다. 나는 잔금은 천천히 벌면서 갚으시라 했다. 그 또한 나로서는 일을 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협력업체마다 양해를 구했다. 그는 미안해하며 어쩔 줄 몰라했지만 오히려 내 마음은 편안했다.
그렇게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또 다시 연락이 왔다. 그마저 접고 지방 병원에 취업해서 페이 닥터로 가게 됐다는 것이다. 반드시 빚은 갚겠다는 말을 하고싶어서 전화를 했다고 했다. 나는 잊으라고 했다. 나는 벌써 잊었다고... 마음에 두지 말라고 했다. 그 당시 나는 꽤 오래 걸렸지만 협력업체 공사대금을 나눠 갚은 상태였다.
지난 주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첫 인사부터 그 말을 꺼낸다. "늘 미안하고 죄를 짓고 사는 것 같습니다" "별 소리를 다하십니다. 그 곳 공기는 좋으시죠?" "그럼요. 물도 좋고.... 그냥 아주 눌러 살까 합니다" "그것도 좋겠네요. 한번 내려간다 간다 하면서 놓치네요" "그러니까요. 한번 내려오세요. 경치 좋은 데도... 회 맛있는 데도 있습니다. 이제 이 곳 주민인걸요" "하하 그러시겠네요. 꼭 한번 내려가겠습니다"
나는 의료계가 제기하는 많은 문제점에 설득력이 있다고 믿는다. 예컨대 의료수가에 있어서도 세부 사항은 모르지만 문제점이 적잖이 있다는 정도는 어렴풋이 안다. 이원장처럼 진정으로 환자를 가족처럼 위하는 진료 행위에 더 높은 가치를 매기고, 이국종 교수의 외과처럼 목숨이 오가는 과목에 더 많은 인센티브가 있어야 할텐데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란 것도 안다.
그런데 일반인에 불과한 나의 그런 인식조차 불식시키는 이번 의협과 전공의의 파업이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 과연 의료계가 깊이 고민해봤는지는 모르겠다. 왜 시민들이 호의적이지 않은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