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언 구할게 있다며 후배가 찾아왔다. 오랜만에 멀리 나가서 점심식사를 하고 그 동네 커피점에 갔다. 사회적 거리두기 시행으로 '테이크 아웃'은 필수다. 깔끔하고 심플한 프랜차이즈매장이다. "너. 이 매장이 건물사이에 낀 가건물인거 알겠냐?" "네? 진짜? 전혀 몰랐는데요. 언제 봤대요" "보여. 신경써서 보려고 안해도... 이 바닥에서 언듯 삼십년이 다 돼가잖아"
그렇다. 그런거다. 한 분야에 종사하다보면 그 쪽으로 눈길이 쏠리고 관심이 가는 건 당연지사다. 깊이 파는만큼 관경은 좁다.
그렇다고 세상을 그 좁은 시야로 보는 건 사람이 모자라고 어리석어서다. 더욱이 그런 사람이 책을 쓴다는 건 글쓰기나 출판을 평생 업으로 하는 작가나 출판계 사람들을 모독하는거다. 기생충을 다룬다고 자신이 굳이 기생충적 사고와 비유를 하는 서씨가 안쓰럽다.
ᆞᆞᆞ<아래는 TCU강남순교수의 글>ᆞᆞᆞ
<'조롱의 정치학'을 정체성으로 삼는 이들, 사회적 무책임성과 위험성>
1. 소위 <조국 흑서>라고 불리는 책의 저자들의 글을 보았다. 그들이 자신의 개인 SNS에 올린 글을 신문들은 매번 퍼다가 기사화한다. 기생충 학자라고 하는 서 0 교수는 자신의 블로그에 현 대통령을 "편충"에, 조국 교수를 "말라리아"에 비유하는 글을 올렸다. 대통령을 "예쁘게" 생긴 "편충"으로 한 것은 "나름의 배려"라고 한다. 조국 교수를 말라리아에 비유하면서 이유는 말라리아가 “수십만 명의 목숨을 빼앗기도” 하고 “삶 자체가 굉장히 비열”하기 때문이란다. 나는 이 글을 그의 SNS가 아닌, 신문 기사에서 읽었다. 이 기사를 접하며, 그 어떤 언어를 사용해서 이런 서사에 개입하는 것 조차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학문적 전공분야의 언어를 차용하여 현 대통령과 전 법무부 장관이며 교수인 사람을 향하여 던지는 그 지독한 조롱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 두 사람이 무슨 무고한 생명을 바다에 빠지게 하고, 잡아다 가두어 고문하며 억압하고, 거짓과 허언으로 총체적 기만이라도 했는가. 어쩌면 서 0 교수는 잘 알고 있는지 모른다. 문 대통령이나 조국 전 장관이 자신처럼 폭력적 조롱을 하지도, 할 줄 조차도 모른다는 것을. 타자에 대한 지독한 인격 모독과 저열한 조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체현하고 있는 사람—그와 같이 ‘교수’라는 직함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더욱 깊은 비애를 느낀다. 인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존중의 자취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 교수로부터 배우는 학생들은, 과연 무엇을 배우는 것일까.
2. ‘가르치는 행위’란 언제나 ‘자서전적’이다. 나의 교수 철학이다. 무슨 과목을 가르치든, 어떤 분야를 가르치든 가르치는 선생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가르치는 것’이라는 의미다. 학생들은 교과서나 강의 내용만을 암기하고 배우는 것이 아니다. 선생을 통해서 '정보'만이 아니라, 학생의 관점을 형성하는 자양분을 제공하는 ‘지식’을 접한다는 의미이다. 배움의 과정은 그 배움의 매체인 선생의 사람됨, 그의 타자를 보고 대하는 시선과 가치관을 함께 체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직 교수가 아니어서 늘 ‘전 교수’라고 명명되는 진00, 현직 교수인 서0 교수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온 사람이라는 점에서, 나는 그들의 ‘조롱의 서사’를 자신의 정체성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심각하고 위험한 것이라고 본다. 그들은 한 개인이기만 할 ‘사치’를 지니지 못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무수한 학생들과 시민들이 ‘선생’이라고 하는 직책을 부여한 공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개인에 대한 모독과 조롱을 할 때, 그는 한 개인으로서의 표현의 자유만이 아니라, 공인으로서의 ‘공적 책임성’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개인적 발언이 공적 영역에 들어섰을 때 지니게 되는 '공적 함의’를 성찰하는 비판적 자기 점검의 단계를 먼저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개인으로 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그 개인 생각을 공인으로서 글/말로 발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단순한 개인적 생각이라고 할 사치가 '교수’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없다.
3. 파올로 프레이리(P. Freire)는 두 종류의 교육에 대하여 말한다. 학생들에게 선생이 가진 ‘정보’만을 계좌에 이체해 주는 것과 같은 소위 ‘은행식 교육(banking education)’은 비판적 시각을 형성하게 하지 못하게 하기에 지양해야 한다. 선생의 주요 역할은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물음 묻기’를 가르치는 것이다. 문제를 들여다보고 그 문제에 대하여 어떠한 분석과 적절한 질문을 하는 것을 배우는 ‘문제제기식 교육 (problem posing education)’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어떤 사건에 비판적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비판적 문제 제기’와 타자에 대한 기본적 존중심조차 부재한 ‘몰지성적 조롱’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교수라는 직함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쳐 온 진00 전 교수와 서0 교수는 정말 모르는 것인가. 교수만이 아니다. 공적 영역에서의 여타의 언설은 언제나 그리고 이미 '정치적'이다. 그 언설이 강의실/교실이든, 설교의 형식으로 행해지는 교회 강단이든, 독서모임이든, 모든 종류의 언설이 공적 영역에 등장할 때, 그것은 이미 '정치적 함의'를 지닌다. 예를 들어서, 현재 정부의 방역지침을 거스르는 교회의 성서 해석이 단지 종교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정치적 함의를 지닌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한다. 4.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에 허위사실들을 퍼뜨릴 때, 미국 언론이 그것을 비판하기 위하여 기사화하는 것은 많이 보았다. 그런데 나라의 중책을 맡은 이들도 아닌 진00 전 교수, 그리고 서0 교수 와 같은 사람들이 자신의 SNS에 올린 글들, 특히 그 글의 내용이 특정인에 대한 ‘저열한 조롱’으로 가득한 글을 최소한의 문제 제기도 없이 그대로 복사하여 기사화하는 언론, 그러한 언론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조롱 기사를 통해 심리적 대리만족을 하며 열광하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조롱의 서사’를 지면에 채우는 언론이 보여주고 지향하는 세계는 무엇인가.
5. 언론은 두 가지 중요한 기능을 한다. 하나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 (reflection of reality)'이며, 또 다른 하나는 ‘현실을 창출 (production of reality)’하는 역할을 한다. 어떤 주제를 톱기사로 만드는가, 어떤 사건을 하찮은 사건으로 범주화하고 보이지 않게 하는가, 무엇을 생략하고 무엇을 부각시키는가, 어떠한 제목을 붙이는가 등에 따라서 언론은 사람들에게 특정한 정치관, 인간관, 세계관, 가치관 등을 반영하고 주입시키고 지향한다. ‘조롱의 레토릭’을 복사하여 그것을 마치 기사처럼 인쇄하여 확산할 때마다, 언론은 일그러진 현실을 창출하고 재생산한다. 진00 전교수나 서0교수와 같은 ‘조롱의 서사’가 마치 ‘비판적 문제 제기’인 것처럼 착각하는 일그러진 영웅심과 몰지성/반지성이 한국사회를 뒤덮는 악순환의 고리는 이어지는 것이다. 교수라는 직책을 지닌 사람들은 자유와 특권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엄중한 사회적 책임성을 지닌다. 나는 그들이 타자의 인격을 모독하고 존중심을 짓밟는 반지성적, 비인격적 ‘조롱’이 아니라, 어떠한 관점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세밀하게 분석하고 그 한계를 짚어내는 지성적인 ‘비판적 문제 제기’를 하게 되기 바란다. 또한 언론은 개인의 SNS의 글을 마치 중요한 기사처럼 복사하여 재생산하는 무책임하고 해로운 행위로 그 엄중한 사회적 책임을 낭비하고 방기하기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