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딸아이의 22번째 생일입니다. 누구의 생일이건 늘 무심하게 넘기는데 익숙한 아비라서 선물도 준비하지 않았고 축하인사도 건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아내가 사온 케잌을 앞에 두고 생일축하노래에 어색한 손뼉장단을 맞춰줬습니다. 나로서는 흔하지 않은 일입니다.
딸은 자라면서 무던히도 엄마 속을 썩였습니다. 제 탓이 아니었습니다. 태어나서부터 유난히 잔병치레를 많이 해서 간이 콩알만한 아내를 자주 놀래켰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부부가 어디를 가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순하디 순한 아이였습니다. 자기 적성을 빨리 알아채고 진로도 정할 줄 아는 똑똑한 아이이고 한밤중에 안락사할 뻔한 강아지를 안고 온 정 많은 아이기도 합니다.
저는 칭찬에 인색한 아비입니다. 자식을 칭찬으로 키워야한다는 말을 수없이 읽고 들었음에도 성정이 따라주지 못해서입니다. 남이 부러워 할 만한 대학을 갔을 때도 축하인사를 건넨 기억이 없으니까요. 요근래 칭찬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요즘들어 외부활동이 많은 아내를 대신해 제 방과 거실 그리고 주방을 며칠에 걸쳐 청소를 했을 때였습니다. "동생방도 치워주지 그랬어"란 말을 보탰다가 어지러놓기만 하는 동생때문에 그러잖아도 속상했는지 울음을 터트리는 통에 수습하느라 혼이 나긴 했습니다.
그저께 저녁에는 다이어트중이라길래 지가 좋아하는 평양냉면으로 유혹을 했더니 잠시 고민하다가 홀라당 넘어왔습니다. 오랜만에 부녀간에 외출이었습니다. "아빠 나 사리는 반만 먹을래. 탄수화물이잖아" "냉면 사리는 메밀이라 다이어트에 지장없어." 물론 그다지 과학적인 소견은 아닙니다. "그래도... 그냥 만두 먹을까봐" "만두피가 밀가루잖아. 그게 탄수화물 덩어리야" "그런가?" "그럼" 우리는 결국 냉면과 만두를 다 시켜서 먹었습니다. 돌아오면서 놀렸습니다. "다이어트한다며...? 결국 그렇게 먹을거면서...." "아빠때문이잖아. 엄마도 밤마다 아빠가 라면 먹였잖아" "나는 분명 한 젓가락만 맛을 보라고 한거고 그 뒤는 엄마가 자진해서 그냥 먹은거야. 너도 아빠가 냉면 먹겠냐고 물어만 본 거잖아. 따라나서서 니 발로 간거잖아." "아빤 참 못됐어. 나는 엄마랑 닮은거야. 착한거지" "넌 모르지만 나이들면 밥심으로 사는 거야. 엄마는 그런거 하면 안돼" 그렇게 투닥거리는게 마냥 즐거운 짖꿎은 아비입니다.
아이들은 전적으로 지 엄마편입니다. 저는 그렇게 1대3으로 갈린 상황이 익숙하고 한편으로 다행으로 여기고 삽니다. 아이들은 바깥에서 일어난 일, 가령 친구와 있었던 일, 평소의 학교 생활은 항상 엄마와 먼저 대화를 합니다. 아내는 그 긴 수다를 한번도 끊지않고 다 들어줍니다. 나로서는 힘겨운 일입니다. 내가 꼭 알아야하고 상의할 내용이면 아내가 요약정리해서 말해 줍니다. 한결 수월한데 아주 가끔은 살짝 서운할 때도 있습니다.
아들도 공부를 곧잘 합니다. 특목고를 가려할 때 제가 말렸습니다. 욕심이 있었을텐데 다양한 친구들과 어울리고 사귀라면서 일반고를 가는게 좋다고하니 순순히 따라준 아이입니다. 대학을 정하면서도 최종적으로 제게 의견을 묻고는 따라줬습니다. 물론 제가 먼저 얘기를 꺼내지는 않습니다. 그런 경우를 빼고나면 저는 늘 아들을 어린애 대하듯 합니다. 186의 올려다 봐야 할 장정인데 저는 늘 녀석의 개구장이 시절이 그립습니다. 소파에 누워있을 때나 책상에 앉아있을 때 어느 때고 툭 치고 목을 조르며 장난을 겁니다. 그렇게 씩씩거릴 때까지 함께 뒹굴고 나면 왠지 뿌듯합니다. 이유는 아직 저도 잘 모릅니다.
어제는 외출했던 아내가 돌아오자마자 아들이 그날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소리를 안방에서 들었습니다. "엄마. 오늘 노을이 너무 이뻐서 찍었어. 이것 봐....정말 멋있지 않아...." 아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함께 있던 저한테는 보여주지 않았던 겁니다. 저는 이제껏 아이들의 성적을 궁금해하지도 성적표를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이 어떤 걸까 궁금했습니다. 그날 밤. 식탁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데 아들이 물을 먹으러 나왔습니다. "야 너 아까 엄마 보여준 노을 사진 아빠한테 보내줘봐" "네. 근데 왜요? " "그냥 임마!" "네~" 사진 속 노을이 참 이쁩니다. 아들은 이공계입니다. 국어보다는 수학을 좋아하는 아이였습니다. 혹시나 걱정스러웠는데 이런 말랑한 감성을 가졌다는 게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대학을 가고서도 성적은 늘 4.0이상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걸로 칭찬해준 기억이 없습니다. 나로서는 사진을 보여달라고 한 것이 특급칭찬인데 제 놈이 알런지 모르겠습니다.
아... 그리고 녀석이 최근 사귀고 있는 여자친구의 사진과 진도를 아는 사람은 저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뭘 더 바라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