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많아서 말없는 세상이 그립다

by 문성훈

며칠 전 퇴근 무렵에 친한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님 오늘 뭐 하슈~?"
"별일 없는데 왜?"
"그냥... 저녁이나 먹자고..."
"술빼고 먹자면 본다"
"에이 진짜... 딱 한병. 막걸리 한병 나눠마십시다. 반주로... 나 요즘 술 안먹은지 오래됐어. 먹어도 딱 한잔이지. 진짜라니까. 한번 보슈~"
"알았다. 그 홍탁집에서 보자"

동생은 죽을 병은 아니지만 지병이 있어 술은 삼가해야되는데 워낙 술을 즐긴다. 자주 전화가 오는데 이래선 안되겠다싶어 술이 곁들여질 것 같으면 매몰차게 거절해왔다.
어디 술친구가 나뿐이겠냐만 나라도 그래야 할 것 같았다. 10년 전까지 술을 물 들이키듯 마시고 다니던 시절 술친구들 중에 둘셋은 지금 아예 술을 마실 수 없다. 공범으로서 일정부분 죄책감을 느끼고 산다.
동생은 술만 거나하게 되면 전화를 하곤 했는데 아무리 감추려고 애를 써도 금방 들키고 만다. 그런데 최근 통화에서는 술냄새가 안났다.

얼굴이 좋다. 안심이다. 어차피 9시까지 영업이니 기껏 먹어봤자 얼마나 먹겠냐만 그래도 마음을 풀어놓고 만나는게 어딘가.
"얼굴 좋네. 요즘은 술 안먹나보다"
"안먹어요 형. 먹어도 진짜 한잔이라니까. 얼굴 좋지. 요즘 내가 도 닦고 있다니까..."
"'도'같은 소리하고 있네. 뭔데? 또..."
최근에 유투브에서 강의를 듣다 심취해서 그 방면으로 석사과정에 입학했단다.
"잘했다. 근데 이번에는 좀 마쳐라. 또 중간에 뛰쳐 나오지 말고...."
"그럴려고요. 그런다니까. 알았어"
"그런데 너..."
"잠깐~!" 동생이 내 말을 토막낸다. 뭐 더 주문이라도 하려나 싶었다.
"스탑~!! 형. 오늘은 질문하지마. 형은 맨말 만나면 질문만 해. 오늘은 그냥 얘기해"
그러고보니 항상 그래왔던 것 같다. 꼭 동생뿐만 아니라 누구를 만나더라도 늘 질문이 많았다.
어쨌든 다른 얘기로 시간을 보냈지만 동생은 최근 제 동향을 알려주려 했던 것이었고, 나는 전화에서 이미 그걸 느꼈고 마음을 풀어놓고 나왔으니 들리지 않는 얘기도 들었다.

우리는 전혀 다른 얘기를 나누면서도 원래 하고자 하는 얘기를 전달하곤 한다. 동물도 몇 가지 그들만의 소리로 위험을 알리고 의사를 전달한다. 인간도 동물에 속해서인지 아니면 말과 글자가 없던 시절의 원초적 소통본능이 아직 그대로 내려와서 가능한 건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그 날의 기억을 소환한 건 오늘 본 인터뷰 기사의 한 대목을 읽어서다. 이해찬 전대표가 유시민작가에게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물려줄 때의 에피소드다.
"...저녁이나 먹자고. 그랬더니 안 나오려고 그래. 왜 먹자는지 뻔히 아니까(웃음). 결국 자리가 돼서 만났더니 저한테 그래요. “형님,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오늘은 술이나 하시지요.” 나왔다는 건 하겠다고 자기가 정리를 하고 온 거지."

말이 필요없는 사이를 지음(知音)이라고 한다던가.
무슨 말을 해도 비틀고 꼬집는 세상을 마스크로 입을 가리고 살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고보니 지음지교(知音之交)만큼 절실한 게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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