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이뻐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이제 중학교 1학년인데 제법 숙녀 티를 내는 것조차 이쁘기만 합니다. 가끔 너무 순수해서 다칠까봐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만 커가는 모습이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듭니다. 아이들은 그대로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어른 마음을 들여다 볼 줄도 압니다. 어른이 되면 그리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세상을 배우다보면 한꺼풀 두꺼풀 맑은 눈에 안경이 덧씌어집니다. 그리고 언제 누구를 만날 때 외투를 꺼내 입어야 할 지 알게 됩니다. 한편 슬프기도 하지만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날 때면 으레 묻는 말이 있습니다. "너 공부하기 싫지" "네" 1초도 걸리지 않습니다. "숙제는?" "싫어요" "다하고 놀면 되잖아. 그거 안하면 뭐할건데?" "에버랜드도 가야되고... 과천대공원도 가고싶고... 엄마 아빠랑 여행도... 그리고 동영상도 얼마나 볼 게 많은데요" "그렇구나" 나름대로 구상해놓은 스케쥴이 빡빡합니다. 저는 아이에게 왜 공부를 해야하는지. 수학은 왜 싫어하면 안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엘빈 토플러는 "한국의 학생들은 하루 15시간동안 학교와 학원에서 미래에 필요하지도 않은 지식과 존재하지도 않을 직업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말을 남겼습니다만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게다가 저는 교육학자도 아니니까요. 다만 그런 어른 한 사람쯤 있어도 좋을 것 같아서입니다. "지금 니 기분은 어때?" "뭘 하고 싶니?" 그리고 "아 그렇구나" 대답해주는 어른 말입니다. 돌아보면 제가 고만할 때 어른들은 늘 한결같이 정답만 말해 준 것 같습니다. "어른 말 잘들어야 돼" "공부 잘하지?" 그런 얘기말입니다. 그런데 어른 된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을 잘 따랐다고 해서 성공하거나 행복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능력이 수학성적, 운동신경, 과학적 사고, 복종심 일지 아니면 자존감, 따뜻한 심성,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일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감성이 뛰어난 사람이 지능이 높은 사람들을 선도하고 세상을 이끄는 실례는 차고 넘칩니다.
저는 아이에게 야단도 달게 맞습니다. 녀석의 남동생은 초등학교1학년입니다.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아파트에 살았다면 허구헌날 인터폰이 울렸을 개구장이입니다. 그래도 저를 보면 제일 먼저 달려와 인사하는 녀석입니다. 한번은 녀석의 슬리퍼를 신고 바깥에 나갔다가 된통 혼이 났습니다. 자기 허락을 받으라고 합니다. 할수없이 제 신발을 갈아신고 다음부터는 꼭 허락을 받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눈 뜨는 순간부터 잠드는 시간까지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느낌을 가질 수 밖에 없는 하루를 보냅니다. 기분 좋은 날보다 나쁜 기억을 더 많이 저장하게 됩니다. 많는 것을 주의해야하고 싫지만 해야 하는 일이 더 많습니다. 아이들은 이성의 통제보다는 본성에 가깝게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래서 감정의 기복도 클 수 밖에 없습니다. 어른들도 화병이 난다고 하는데 아이들이라고 없겠습니까. 부모는 자식에게 언제나 바르게 가르치려고 합니다. 오랜 대화를 나눠서 아이가 수긍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시간이 가져다 준 안정에 불과할 지 모릅니다. 증기기관차가 출발하면 하얀 김을 내뿜습니다. 그 감정 그대로를 받아 줄 어른 한 사람쯤 있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아이는 사랑과 관심이라는 연료를 태우면서 힘차게 달리지 않을까요.
우리가 가르치기보다 자신의 얘기를 들어 주는 어른, 흔쾌히 잘못했다고 말하는 어른이 되어준다면 아이들은 더 건강하게 자라고 세대간의 갈등은 옅어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