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이신데요" "부유하게 나셨지만 스스로 가난을 택하셨습니다. 청빈을 실천하며 하느님을 쫓으셨고 병들고 소경이 되어 돌아가셨지요. 성인의 성인이십니다" "아.. 저는 싫습니다. 다른 성인으로 해주십시요" "네?" "지금 현생도 변변찮은데... 거 있잖습니까 이왕이면 뭐 왕이나 부자로 베푸는 삶. 장수하며 편안한 여생을 보내다가 하느님곁으로 가신... 그런 분으로..." "그렇게 사셨으면 성인이 못되십니다. 축일도 마침 같은 달이십니다." "아..네" 신부님의 '못되십니다'란 말에 액센트가 실린것같아 더 이상의 저항은 못하고 받은 세례명이 '프란치스코'다. 정확히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오늘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이다.
그러고보면 오래전 집안의 영향으로 반야심경 첫머리밖에 못외우면서 어물쩍 받은 법명은 원봉(圓峰)이었다. '둥근 봉우리'란 뜻이니 내 성격이 뾰쪽하고 모가 나 보여서 스님이 그리 주셨지않나싶다. 이후 성인이 되어 누구의 손에 이끌려서도 아니고 제발로 찾아간 성당이고 스스로 정한 종교가 카톨릭이었다. 그렇게 불측하게도 대면대면하게 프란치스코 세례명을 가지게 된 나지만 교황께서 최초로 '프란치스코'란 이름을 선택하셨을 때 자부심 비슷한 걸 느끼며 어깨가 으쓱했던 기억이 있다.
이렇듯 지나간 둥근 봉우리를 떠올리고 성인의 축일을 맞아 당신 삶을 다시 되짚는 것은 아무런 의미없이 주신 이름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무릇 성직자의 시선이 범인과는 남다른데가 있음을 믿기에 동사무소 직원이 한글 깨치지못한 민원인의 자식 출생신고에 잘못된 한자를 기록하는 것과는 다르게 의미있는 이름을 주셨음이 분명하다.
아직 이 나이 되도록 뾰족한 성정을 두리뭉실하게 다듬지도, 물려받거나 이룬 재산이 없어 기부도 못하는 신세지만 이런 날만이라도 내 지나온 삶을 반추하고 마음을 새로이 가다듬으려 한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향락에 빠졌던 10대를 거치며 전쟁에 출정하기도 했던 분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회심하여 전 재산을 기부하고 나환자와 가난한 자들을 돌보며 알몸으로 하느님만을 섬기다 가신 분이 프란치스코 성인이시다.
감히 흉내도 못내겠지만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에 낀 살얼음이라도 녹일 햇볕을 비추는데 일조해야겠다. 알몸으로 그 분을 받들지는 못하는 미욱하고 신실하지 못한 신도지만 죄책감까지 떨쳐버리고 살지는 않아야겠다. 성인은 마흔넷에 선종하셨고 나는 이미 그보다 십여년 더 살았으나 의미와 깊이는 부질없었으니 앞으로의 삶은 보다 충실한 날들로 채워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부족하기 이를데 없고 이미 세속에 찌들어있으니 감히 자신할 수 없지만 잊고 살다 다시 되새기기를 거듭할 수 밖에.
어쩌다보니 당신처럼 욕정을 못이겨 장미 가시덤풀에 구를 나이는 넘겼고, 말년에 소경이 되신 것처럼 나 역시 그런 장애를 지녔으니 기꺼이 훈장으로 여길 참이다, 뾰족한 바위를 둥글게 다듬는 노력으로 당신이 아시시의 장미에 가시가 돋지않는 기적을 보이신 뜻을 받들어 세상의 수없이 많은 가시중 까끄라기 하나라도 문지르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그러려면 죽는 날까지 배우려는 자세로 성찰과 사유를 게을리하지않아야 될텐데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런 말씀을 하신 모양이다. "남을 개종시키려 드는 것은 실로 허황된 짓이다.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다. 서로를 알고,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고, 생각의 반경을 넓히는 것, 우리에게는 바로 그런 태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