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동안 두근대던 설레임이, 간절한 바램이 찢어져 뒹군다. 그 밤 꿈이 거짓이었다는 배신감때문일까. 이깟 종이조까리에 목을 맸던 어리석음에 대한 회한이 밀려와서일까. 누군가의 품안 어딘가, 지갑 속에서 신주처럼 모셔졌던 로또 복권 한장을 바라보고 있다.
누구나 알지만 예기치않은 불행은 느닷없이 뒷통수를 칠 때가 많지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제발로 걸어오는 걸 본 사람은 드물다. 죽어도 마땅한 혹은 아쉽지않을 사람은 질기게도 오래 살고 우리 곁에 남았으면 하고 죽음을 애닯아 할 사람은 일찍 간다. 그것을 철학자나 심리학자가 어떻게 말하든 물리학자가 무엇으로 증명하든 우리는 그렇게 느끼고 살고있다.
아들이 고등학생 때 물었다. "너는 커서 제일 하고싶은 게 뭐냐?" "요트를 갖고 싶어요. 그걸로 세계여행도 다니고...." 지금 아들은 그 요트보다 큰 배도 다룰 수 있는 기술을 익히는 대학을 다닌다. 그 바램때문이 아니었다. 굳이 연결짓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 요트가 007시리즈에 나오는 최첨단 기능을 가진 날씬한 보트인지 아니면 경주에서 보는 큰 돛을 단 낭만적인 요트인지 나는 모른다. 확실한 건 아들의 바램이 실은 요트를 가질만한 부자가 되고 싶다는 것이었고 아직 제대로 돈을 벌어보지 못한 학생이니 그 확률이나 가능성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는 것 정도다. 작고한 전임 대통령이 즐기던 것이든 교수가 정년퇴임을 앞당기고 구매에 나선 것이든 아니면 아들이 갖고 싶다던 것이든 요트를 가진 삶은 일반인에게 생경하고 멀어만 보인다.
오래전 작고하신 고모부는 평생 한량이었고 백수였다. 여든 고모는 지금도 일을 하신다. 그런데 고모부는 사람을 만나도 호텔 커피숍 아니면 가지 않으셨고 집에 돈 한푼 들여놓지 않는데 명함은 늘 전무거나 이사셨던 분이다. 학창시절 들리면 방 한켠에 골프 캐디백이 놓여있었다. 한번도 골프장을 가시는 걸 보지 못했고 그에 관련된 얘기를 전혀 들은 바가 없는 걸 보면 즐기거나 자주 나갈 형편은 아니셨던 게 분명하다. 전월세를 전전하다 작은 아파트를 마련한 것도 고모부께서 돌아가신 이후다. 장식은 아닐지라도 과시를 위해 필요한 소품같은 것이었다. 당시에도 그 후로도 오랫동안 골프는 내게 바라볼 수 없는 취미였다. 그런데 사람 일이란 게 알수 없는 것이어서 나는 마흔에 골프를 치기 시작해서 몇해전까지 즐겼다. 지금도 마음이 동한다면 큰 부담없이 갈 수 있는 상황이고 실력이 된다. 골프를 배우기 전까지 주변에서 골프를 권하면 나는 늘 " 조그만 구멍에 공 하나 집어넣겠다고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느냐"라든지 "그럴 돈이 있으면 다른데 쓰겠다"고 했다. 절반은 맞는 말이었고 절반은 질시나 자위하는 말이었다. 여건은 어려운데 필요에 의해 골프를 하게 됐을 때 나는 두가지 결심을 했다. 하나는 최소한의 비용을 들여야겠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그래서 얻는 게 없다면 즉시 때려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10년째 골프를 치던 친구에게 어느정도면 일행이 불편해하지 않는가. 그리고 경비는 얼마나 들까를 물었다. 내가 원하는 경지에 이르려면 꽤 많은 돈이 들 수 밖에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그 지점에 도달하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었다. 그 시간이 줄면 줄수록 그래서 일부러 찾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 수록 돈은 절약된다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홀인원을 하고 싱글을 하기까지 3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 기간동안 연습장 렛슨프로로부터 "골프를 헬스 대신 하십니까?"라는 말을 듣기도 했고 갈비뼈는 두번 나갔으며 초등생이던 아들은 아빠 직업란에 골프선수라고 적는 해프닝이 있었다. 그렇게 아마츄어로서는 상당히 빠른 시간안에 지점에 도달했다. 그러므로써 경비는 최소화됐고 비지니스적으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골프는 부자들의 취미라 여겨 바라만 보던 것이었는데 어느새 내 삶 안으로 들어왔다.
회사 여직원에게 이런 얘기를 간혹 하곤 했다.. "디자인을 제대로 한다는 건 어렵고 한국에서는 부자가 되기도 어려워. 그런데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라서 부자로 살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하지. 가령 명품 가방, 옷이 있잖아. 비싸잖아. 그런데 디자이너는 눈이 좋아지거든... 감각도 개발되고... 그래서 명품보다 나은 제품을 선별하고 누릴 수 있게 돼. 10만원으로 100만원의 가치를 누릴 수 있고 평가를 받을 수도 있지. 그게 혜택이고 보너스인 셈이야. 그걸 잊지않으면 이미 부자가 된거지"
나는 아들의 바램을 들었을 때 "그건 어렵지 않겠니?" 혹은 "그러려면 일단 돈을 많이 벌어야겠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빠도 태워줘라"라고 했다. 목표가 있다면 방법은 다양하니 살아가면서 선택하고 찾아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다만 요트를 가지고 싶어서 매주 복권판매소 앞에서 줄을 서지는 말았으면 한다. 정선 카지노에서 잿팟을 터뜨리는 사람은 드물지만 가산을 탕진한 사람들이 맡긴 차들로 주차장은 늘 만원이다. 몇 십억 당첨 행운을 가져간 사람은 뉴스에 나오지만 매주 긴 줄에 늘어섰던 수많은 사람들의 실망섞인 한숨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런데 전 세계 카지노중에 단 한곳이라도 영업부진으로 문을 닫았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고, 복권을 발행하는 기관은 언제나 흑자다. 이렇듯 현실은 냉엄하고 가리워진 진실은 추악하지만 그 안에도 길은 있는 법이다. 다만 보이는 사람에게만 보일 뿐이다. 나는 아들이 바라는 요트를 가지는 날이 오기를 그리고 밝은 눈으로 현명하게 그 길을 찾아가기를 바란다.
누구나 지향하는 삶이 있다. 가능할지 여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그 지점에 도달했을 때 구경꾼들만 트집을 잡거나 환호한다. 그런데 그 과정이 정당하다면 개의치않아도 된다. 어차피 구경꾼들은 잠시 모였다 흩어지고 과도한 관심은 질투나 시기심 혹은 의도가 있어서다.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이고 자신이 감당할 몫이다. 구경꾼들은 영원히 주인공으로 살지 못할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