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내가 된다는 것

by 문성훈

사람마다 노이로제나 트라우마가 있을텐데 어떤 이름으로 불리건 일종의 정신적인 불편함내지는 불쾌감을 유발하는 것만은 분명해보인다.
내가 일상에서 겪는 이런 류의 감정은 반려견의 패드나 배달음식 용기, 비닐등을 반출할 때 그리고 전화벨이 울릴 때 일어난다. 잘 썩지않는데다 불필요해 보이기까지하는 이런 폐기물을 내 집이나 가족이 발생시키는 것에 과도할 정도로 민감해하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인지 최근들어 반출량이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는 건 다행이다.
이렇게 나나 주변의 협조로 조절가능한 것이 있는 반면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면서 조절 불가능한 것도 있다.

대표적인 것인 전화다. 전화벨이 울리면 긴장하고 내심 불안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벨소리도 사랑하는 조카딸의 목소리로 바꾼지 오래다. "큰 아빠 전화 받으세요"로 시작하는 벨소리는 막내동생이 녹음해서 보내줬다. 다소 나아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가시지는 않는다.
일종의 직업병이기도 하고 결벽적인 성격탓이기도 하다. 꽤 오랫동안 늘 긴장하고 팍팍한 근무환경 거기에 시시각각으로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일을 하다보니 전화벨 소리는 빠른 판단을 요구하거나 해결을 바라는 일종의 경보 싸이렌이었다. 한때 직장의 책임자로 있을 때는 하루종일 울리는 전화벨과 결재를 받으려는 노크소리에 화장실조차 가기 힘들었다면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사업을 시작하고 지금은 일의 강도와 업무량을 조절하고 인원감축으로 모든 걸 내려놓을대로 내려놓은 상황이어서 전화가 울리는 횟수는 대폭 줄어들었다지만 여전히 전화벨이 울리는게 반갑지는 않다. 4~5년전부터 외부활동이나 모임을 줄이거나 참석하지 않는다. 오롯히 혼자인 시간이 늘어나고 여행도 홀가분하게 혼자 다니니 비로소 안식이 돌아오고 있음을 느낀다.
예전 내 생활을 아는 주변 사람들과 만남을 가졌던 이들은 나의 이런 변화에 무척 놀랍다는 반응을 보인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얼마나 나를 감추고 살아왔는지를 실감한다. 항상 밝고 유머러스하며 좌중을 이끄는 모습만 보여주다보니 실제 나와는 점차 멀어져갔다. 내가 좋아하는 상황과 매일 맞딱뜨리는 반복되는 생활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허둥대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렇다고 지나간 시간이 아깝다거나 만났던 사람들이 소중하지 않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이제는 부족함만 감수한다면 그 가속도나 탄력만으로 살아온 기간만큼은 더 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나만 그런 것인가.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남이 보는 자신과 실제의 나 그리고 내가 원하는 삶과 현재의 모습이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각자 다른 이유와 원인으로 인해 항상 만족스러운 상태를 유지하고 살지는 않는다. 나는 그것이 우리들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데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라면서 아이는 이래야하고 학생은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는 그리고 마침내 직장인의 태도는 어때야한다는 식의 지극히 보편적이라지만 실은 편파적이고 부당하기까지 한 시각을 의식하고 그에 맞춰 살아온 결과가 아닌가싶다.

나만해도 고등학교 입학전까지 비만이었다. 초등학교1학년때 초6이나 중학생 사이즈 옷을 입었으니 지금의 모습에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드러난 신체적인 변화만 두고봐도 이럴진대 보이지않는 생각이나 감정을 남이 가늠하기란 불가능하다.
오래전 아이가 ADHD(주의력 결핍/과잉행동장애)진단을 받은 부모를 안다. 당시 내가 보기에 그 아이는 내 어릴적만큼도 심하지않았다. 당황스럽지만 불쾌하기도 했던 부모가 아무런 치료를 하지않고 키웠다. 지금은 심신이 건강한 청년이 되어 있다.

우리 개개인은 대부분 평범하고 보편적이라는 애매모호하고 지극히 주관적인 선을 지키는 데 얽매여있다. 혼기가 찬 자녀에게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배우자을 권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중산층의 삶을 지향한다.
평범, 보편, 정상, 중산층이라는 말 속에는 '평균'이라는 입자가 녹여져있다. 필요해서건 의도했던 간에 우리 사회가 만든 이 '평균'은 저울처럼 늘 우리 개개인을 재고 속박한다.
나의 지난 시간은 평균에서 벗어난 삶이었고 지금도 평균적이지는 않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그렇다. 내가 휴일도 없이 18시간 일을 하던 시절에도 누군가는 주말은 쉬고 8시간 일을 했을 것이고, 내가 비만이었던 초등생일때 비쩍 마른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평균은 이런 편차를 사라지게 하는 마술을 부린다. 그래서 그 평범,보편, 정상이라는 평균의 근사치에서 벗어나면 플러스, 마이너스로 갈라세운다.
이런 시각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개인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안식은 찾아오고 비로소 행복이 보이는 것 아닐까.
자유로를 달리다보면 스포츠카가 추월을 거듭하며 질주하는 걸 보게된다. 시속 200km를 질주하다 속도제한 구역에서 60km로 감속하기를 거듭한 사람과 시속 90km를 유지한 사람은 같은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하고 평균속도는 같다. 이들의 운전습관이나 성격은 딴판일텐데 그렇다. 평균의 함정이다.

지구에 생존하는 70억인구 중에 단 한 사람도 같은 사람은 없으며 비슷한 삶을 사는 사람도 없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한다.
세상에 떠도는 온갖 소문과 시끄러운 소음에서 벗어나려면, 나를 옥죄는 부당한 대우와 질시, 편견에서 자유롭고 싶다면, 그래서 자신만의 삶을 살고싶다면 평균이라는 가당찮은 눈금부터 지우고 그 속박으로부터 탈출하는 일이 급선무다.
그래야 비로소 내가 보인다.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 내가 소중하다면 그보다 중요한 건 없지않을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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