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지대의 사람들

by 문성훈

한창 진공관 라디오를 수집할 때가 있었다. 거의 1940~50년대에 생산된 제품인데 잡음이 끼거나 소리가 안나면 일단 뒷뚜껑부터 열어제끼고 끙끙대며 고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제는 둘 자리도 없는데다 디자인별로 거의 다 갖춰서 밤을 새며 인터넷 경매를 하는 일은 없다. 국산은 없고 전부 외산인데 당시 기술력으로 60~70년이 지나도 끄떡없는 제품을 만들었다는 것도 놀랍고 지금도 충분히 감각적인 디자인에 탄복한다.
가끔씩 하나하나 전원을 올려서 음악방송을 듣는다. 주로 모노 스피커인데 스테레오타입도 있다. 문득 라디오의 좌우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는 이렇듯 조화롭고 아름다운데 인간사의 소리는 왜 그렇게 거북하고 거슬릴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뇌는 수백만년간 진화했고 감정은 다양한 형태로 분화됐지만 본능은 그대로 남아있다. 마치 라디오가 진공관에서 트랜지스터로 그리고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었지만 보이지않는 전파를 수신해야 소리를 들려줄 수 있는 것과 같다.
인류의 조상이 수렵과 채취생활을 하며 거친 자연환경과 동물의 위협으로부터 생존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본능 덕이다.
평생을 쓰고도 남을 재산을 가졌음에도 탐욕을 부리는 것은 과거 자연에서 획득한 사냥감이나 열매를 땅이나 동굴에 오래 보관할 수 없었기에 끊임없이 사냥에 나서고 열매를 따야했던 본능이 살아있어서다. 돈이나 은행 잔고는 썩거나 상하지 않는데도 중단하지 못한다.
인류의 새로운 질병인 비만에 시달리면서도 식탐을 부리는 것은 음식물이 귀했던 시절 오랜만의 포식으로 충분한 에너지원이 되어주었던 당분과 지방에 열광했던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먹을 것이 넘쳐나는 선진국일수록 비만은 증가한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도 빠른 판단으로 즉각적인 위험을 피한다든지 처음 접한 사물이나 타인에 대해서 친근함을 가지거나 경계를 하게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우리 뇌에 각인된 극적인 본능과 세계관은 넘쳐나는 정보와 지식의 홍수에 떠밀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착각과 오판을 일으키기도 한다.
사실과 데이터에 기반하지 않는 고정관념과 편협한 사고가 그것이다.
시시각각 접하는 정보와 뉴스, 업데이트되는 지식을 매번 솎아내고 합리적으로 분석해서 이성적인 판단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극적 본능에 충실해 긍정과 부정, 수용과 거부,이해와 오해로 구분하다보면 어느새 중간지대는 사라져 버린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지배층과 피지배층, 우익과 좌익, 보수와 진보 그리고 마침내 피아를 구분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형성된 직관적이고 극적인 세계관은 오랜 학습과 많은 지식을 통해서도 극복되지 않고 오히려 체계적으로 잘못된 추측과 맹목적인 추종을 불러일으키킨다. 그 이유가 단순히 언론의 거짓 기사, 정치권의 자극적인 선전 선동, 조작된 사실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오래된 진공 라디오의 음악이 아름답게 들리는 건 양쪽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는 다르지만 화음이 조화로운 악보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간지점에서 들을 수록 떨어져 있을 수록 더 입체감있게 들린다.
우리는 지금 가진 자와 없는 자, 놓지 않으려는 집단과 나누려는 집단이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언론이라는 스피커를 통해 질러내는 소음을 듣고있다.
모두가 바라는 공정, 정의, 행복이라는 악보는 없고 한쪽 스피커의 볼륨만 높으니 화음은 기대할 수도 없다.
양극단에서 당기는 힘은 강력하고 우리에게 내재된 극적 본능은 여전하다. 뇌에 주름잡힌 극단적 세계관은 좀처럼 펴지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중 상당수는 아직 중간지대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에 희망을 가진다.
부자는 아니지만 가난한 이웃과 가진 것을 나누려는 사람, 자신보다는 다수를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사람, 진실을 위해서 두려움을 극복하는 사람, 부정과 부조리에 맞설 용기를 가진 사람,
남의 이야기와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뉴스보다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사람.
그들이 극적 본능에 이끌리기보다는 사실과 데이터에 기반해 세상을 둘로만 나누지 않는 유연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다. 세상의 뒷뚜껑을 열고 잡음과 고장난 한쪽 스피커를 수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게는 보다나은 세상을 바라는 악보가 있다. 중간지대에서 세상의 소리를 좀더 떨어져서 듣는 그들만이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자격이 있다.
나는 그들을 시민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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